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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북한의 6·25(上)

화이트보스 2009. 4. 24. 19:49

<67>북한의 6·25(上)
각종 행사로 체제 선전·결속 다지기 혈안

매년 6월 25일이 되면 북한의 언론매체는 일제히 전쟁의 참상을 환기시키고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긴다. 6·25전쟁과 관련된 각종 행사는 반미사상 교양사업과 김정일 정권의 위대성을 찬양하며 체제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활용한다.

북한의 정치사전은 6·25전쟁을 ‘미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민족해방전쟁이고 미제국주의자들과 그와 결탁한 국내 반동세력을 반대하는 준엄한 계급투쟁이며, 미제를 비롯한 세계 반동의 연합세력에 반대하는 반제반미투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교과서도 6·25에 대해 “오랫동안 침략전쟁을 준비해 온 미제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이 이른 새벽 평화롭던 이 땅 위에 전쟁의 불구름을 일으킨 것”으로 가르친다.

북한에서는 6·25를 ‘남침’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범죄행위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식인들은 ‘공격받은 측에서 3일 만에 적의 수도(서울)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군사상식을 믿고 있다. 북한군 내에서도 과거에는 참전군인들을 통해 남침사실이 알려졌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북한 당국의 장기 세뇌교육 때문에 전후세대들은 모두 ‘북침’으로 알고 있다.

북한이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①미국이 광복 직후부터 전쟁준비에 골몰해 왔고 ②6·25전쟁 직전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3·8선을 시찰했으며 ③상대방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휴일인 일요일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전쟁에서 북한이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근거로 첫째, 미국이 북한을 점령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승리했고 둘째, 전쟁수행 과정에서 인민군대와 간부들이 더욱 강해졌고 혁명역량이 커졌으며 셋째, 미국이 작은 나라인 북한과 싸워 이기지 못함으로써 강대국의 위신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휴전협정을 체결한 1953년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휴전 40주년을 기념해 97년 평양에 개관한 기념관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으로 명명한 것은 이런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전쟁이라도 우리는 ‘6·25’ ‘한국전쟁’으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중국은 ‘조선전쟁’이나 ‘항미 원조전쟁’으로 부른다. 단순히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과 역사적 해석·평가가 정반대인 것이다.

6·25전쟁 발발을 둘러싼 국내외 학계의 시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김일성이 남침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보는 일반적 시각이고, 둘째는 북한의 주장대로 ‘조국해방전쟁’으로 보는 견해이며, 또 하나는 한때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에 의해 제기됐다 이제는 사실상 폐기되다시피 한 수정주의 이론이다. 80년대 초반에 한동안 미국이 아시아의 전략적 방어선에 한국을 제외한 에치슨 라인을 근거로 미국의 ‘남침유도설’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미국과 소련의 각종 비밀자료가 공개돼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면서 북침 주장은 수정주의 시각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25전쟁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김일성이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한 계획 아래 소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으로 이뤄진 무력남침 전쟁으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반민족적 범죄임이 여러 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실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