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월이면 미국 와이오밍의 휴양지 잭슨홀(Jackson Hole)에서는 중요한 금융 심포지엄이 열린다. 주최측 캔자스 연방준비은행(FRB)이 2005년에 내건 주제는 '그린스펀 시대(The Greenspan Era)'였다. 그린스펀 FRB 당시 의장이 은퇴를 앞둔 때여서 특급 경제학자들이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발표가 이어졌다. 자주 다투었던 경쟁자마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라고 치켜세우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입이 헤퍼진 가운데 하나의 분과만은 날 선 공방이 이어졌다. 몇몇 젊은 학자가 호황 속에 잠복된 금융위기 가능성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미국·유럽의 고위 당국자들은 당돌한 도발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며 모멸감을 섞어 반박했지만, '그래도 만약 대형 폭발이 일어나면 중앙은행이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토론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는 터졌고, 다시 1년 뒤 리먼 몰락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그때 그 자리에서 함께 토론해 본 덕분에 위기대응 과정에서 다 같이 해야 할 일을 쉽게 합의했다"고 어느 일본 학자는 증언했다. '그때 그 자리'에 한국은행의 최고 책임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보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요르단·이스라엘·호주 중앙은행 총재까지 끼어든 모임이었다.
이번 위기에서 가장 굼뜬 행동을 고집한 곳이 한국은행이라고 청와대와 경제부처에서는 입 모아 불만이다. 작년 가을 "도대체 뭐 하느냐"고 답답해하다가, 어느 장관은 "아예 문을 닫아버리는 게 좋겠다"라는 욕설 섞인 막말도 했다. 지금껏 분을 다 삭이지 못했다.
한국은행 내부 증언을 들어봐도 그렇다. 위기가 시작된 후 돈을 무제한 살포하는 미국·유럽을 두고 "저러다가 어쩌려고…"라는 비판이 한은 내부에서 압도했다고 한다. 그 지진이 서울의 외환위기로 감염될 줄 모르고 미국식 진압 작전을 '미친 짓'으로 단정하는 발언이 한은 고위층 입에서 자주 나왔다는 얘기다.
한국은행이 월 스트리트의 격진(激震)을 태평양을 건널 수 없는 이웃집 화재로 오판했다는 증거는 작년 8월의 금리 인상이다. 경기 지표가 하강해가던 때 느닷없이 기준 금리를 5%에서 5.25%로 올렸다. 부동산 값마저 하강하던 차에 위험천만한 역주행이었다.
한 번의 오판은 또 다른 실패를 낳았다. 리먼 몰락의 충격에 잘못된 자세를 취했다. 괴물과 맞서 싸우는 용감한 사령관의 모습은커녕,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신중한 대응이 중앙은행의 전매특허인 양 행동했지만, 실은 닥치지 않을 줄 알았던 쓰나미가 막상 눈앞에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허둥대며 금리를 찔끔찔끔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뼈아픈 실책은 금리 결정권을 잃어버린 일이다. 청와대 최고위층과 장관들이 2%라는 숫자까지 주면서 추가 인하를 압박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때 너무 허둥대는 바람에 지나치게 인하 폭이 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자기 그릇을 지키지 못해 정부 개입을 초래한 비싼 대가다.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을 보는 눈은 완전히 달라졌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화 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수호신(守護神)이라던 옛 지위는 무너졌다. 금리·환율만 보는 중앙은행은 이미 중앙은행이 아니다. 금융 시장을 안정시키고 나라 경제 전체를 잘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 새로운 중앙은행의 참모습이다.
한국은행은 입만 열면 '독립'을 말하고, 금융회사를 감독할 독자적 조사권도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정부와 손잡지 않고 '자주독립 정신'으로 홀로 해결할 수 있는 금융위기란 글로벌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가을 국회는 중앙은행에 새 임무, 새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시끄러운 게 싫다고 알아서 합의해 오라거나 미뤄둘 일이 아니다.
우선 정부 쪽에서 많은 권한을 넘겨줘야 한다. 한은을 믿지 못한 나머지 걸핏하면 예산 편성에 개입하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항도 조정해야 한다. 보복성 세무조사까지 실시할 수 있는 꼬투리 근거도 포기해야 한다.
한국은행도 시장 물정 모르는 경제학자와 내부 출신으로 채워져 있는 지배구조야말로 오판을 부르는 재앙의 출발점임을 인정해야 한다. 잭슨홀에서 다른 나라 총재 어깨를 툭 치며 농담을 주고받을 국제 금융통과 금융가 뒷골목 정보까지 아는 시장 출신이 절실하다.
한은 사람들은 "이곳은 절간"이라고 말한다. 현장에서 소외돼 통계나 챙기는 처지, 감독권을 박탈당한 신세, 퇴직 후 낙하산 자리 하나 챙기지 못하는 불출(不出)을 푸념하는 비유다. 열등감, 패배감으로 가득 찬 중앙은행을 절간에서 추방해야 한다. 다름 아닌 시장 바닥으로.
한국은행을 절간에서 쫓아내라
입력 : 2009.09.28 20:14 / 수정 :
"한국은행은 입만 열면 ‘독립’을 말하고
금융회사 감독 조사권을 달라고 하지만,
정부와 손잡지 않고 홀로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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