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신중국 60년

한국 기업들, 어제의 중국은 잊어라박근희삼성전자 중국법인 사장

화이트보스 2010. 1. 30. 16:21

한국 기업들, 어제의 중국은 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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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29 15:57

투자·사업 환경 급속히 변화… 첨단 기술 아니면 투자 안받아
외국기업에 주던 혜택도 축소… 근본적으로 새로운 전략 필요

한국에 있어서 중국은 새롭게 나타난 기회의 나라였다. 1992년 수교 이후 한중 양국이 선린 우호 국가이자 경제 협력 파트너로서 함께 달려 온 게 불과 17년이다. 그 길지 않은 기간에 한국과 중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와 규모로 교류가 확대되어 이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 중국이 최근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보면 마치 1초 1초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잠재력을 운운할 신흥시장이 아니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중심시장으로 변한 것이다. 2008년 구매력 평가에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섰고, 2009년에는 자동차와 노트북 PC 판매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중국은 지난 30년간 매년 두 자릿수의 소비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소비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35% 정도에 불과하다. 세계 주요 국가의 비중이 50~70%인 점에 견주어 보면 중국 소비시장의 미래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서는 글로벌기업은 물론이고 급성장한 로컬기업까지 너나없이 시장 쟁탈에 사활을 걸고 있는 양상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투자 환경과 사업 환경에서도 급속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중국 정부의 정책기조 전환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외자 기업이 어느 분야에 투자를 하더라도 다양한 혜택을 제공했으며, 우리 기업들도 자체 경쟁력에 더해 이러한 우대정책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많은 성공 사례를 만들어 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첨단 기술이 수반되지 않는 투자는 더 이상 반기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고, 외자기업에 주던 각종 혜택도 축소 일로에 있다. 기회의 나라 중국이 이제는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나라로 변모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지금까지의 틀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전략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기업들의 전략에 참고할 만한 몇 가지 중요한 변화의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국민소득 증대에 따른 사회 전반의 변화이다. 종업원들의 급여나 복리후생 등에 대한 욕구가 점점 증폭되고 있고, 소비자 의식 수준 향상에 따라 소비자의 권리 주장과 요구가 까다로워지고 있으며, 나아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대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제 중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기업, 중국의 종업원과 고객과 사회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삼성이 중국에서 내건 슬로건은 "중국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중국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이다. 제품과 서비스의 질 향상은 기본이고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중국 국민 곁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둘째, 중국 로컬기업의 급성장이다. 과거의 로컬기업이 품질보다 원가 경쟁력 차원에서의 경쟁 상대였다면, 이제는 기술과 품질 경쟁력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LCD TV의 경우 2008년까지 삼성이 중국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지만, 2009년 들어 로컬기업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로컬기업들이 가격의 절대적인 우위와 함께 제품 기술까지 추격해 왔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셋째, 법과 제도의 정비와 이의 엄격한 적용이다. 새롭게 정비되거나 강화되고 있는 세무(특히 이전 가격), 노동법, 환경법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경영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대충대충과 편법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법과 제도를 철저히 지키는 정도(正道) 경영이 반드시 필요하다.

넷째, 새로이 입안되어 적용되고 있는 정책들이다. 표준화를 예로 들면 중국은 현재 독자 표준화 제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2020년까지 86개 표준을 국제표준으로 발전시켜 세계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가 제정한 표준 문서만도 10만3000건이고, 제정 중인 표준 문서도 2만3000건에 이른다. 표준화에 참여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 시장에 아예 참여도 못하게 된다.

특허도 급증하고 있다. 2008년 말 현재 중국 국내의 특허 등록이 40만 건, 특허 출원은 80만 건을 상회하고 있다. 삼성도 일부 제품에서 특허 문제가 불거져 큰 곤욕을 겪은 적이 있다. 특허 이슈를 소홀히 했다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중국 정부가 지금까지의 '시장환기술(市場換技術·외자기업에게 시장을 내주는 대신 기술을 얻겠다)' 정책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펼치고 있는 강력한 '자주창신(自主創新)' 드라이브이다. 중국의 2008년 R&D 투자액은 669억달러로 한국의 2배이다. 자주창신과 기술 확보를 절대적 국책 과제로 중시하는 만큼 외자기업에 대한 무언의 기술 전수 압력 또한 부담이다.

이제 중국에 진출하는 제조업체는 크든 작든 반드시 자체 R&D 조직을 가져가야 할 상황이 될 것이다. 삼성은 이미 6개 독립 연구법인과 18개 생산법인 내 연구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R&D 조직 운영은 외자기업 스스로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2008년 현재 중국의 R&D 기술인력은 170만 명으로 세계 최다이며, 이공계 석·박사 배출 인력만 해도 매년 15만 명에 이르기 때문에 이러한 우수한 기술 인재들을 잘 활용하면 기술 경쟁력을 배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만, 결론은 "오늘의 중국은 결코 어제의 중국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제 중국에 대한 과거의 인식은 모두 잊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중국을 더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여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고 방심하는 사이에 중국시장은 다른 나라, 다른 기업에 넘어갈 수 있다.

한국이 이웃 중국의 성장에 따른 과실을 향유하지 못한다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재현과 4만달러 선진국 진입, 그리고 강소국의 실현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