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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때 물러난 김석기 前 경찰청장 내정자

화이트보스 2010. 3. 22. 10:18

'용산 참사' 때 물러난 김석기 前 경찰청장 내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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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3.22 03:04 / 수정 : 2010.03.22 10:02

"그때 당신이 경찰청장이었다면?… 화염병에 선량한 시민이 죽었다면?…"
민간기업의 고문 제의 거절… 경찰 후배들에게 신세지거나 부담되는 처신을 안 할 생각
용산 참사 돈 주고 타결… "시간이 걸려도 원칙대로 해결하기를 기대했는데"

작년 말 용산 참사가 타결됐을 때, 김석기(58) 전 경찰청장 내정자를 떠올렸다. 그땐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미국 보스턴대 방문연구원으로 떠나 있었다.

그런 그가 잠깐 귀국했다. 선친 제사와 노모 생신을 겸해 온 것이다. 그는 머리를 부풀려 올려 3:7 가르마를 탄 '공직자의 표준 헤어스타일'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왜 떠났나?

"작년 2월 12일 물러난 뒤로 고맙게도 많은 분이 위로를 해줬다. 저녁마다 불려나가 '고생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잘 생활하라'는 말을 들었다. 관심 갖고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매일 그런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일본 경험은 많았지만, 미국을 잘 모르니 미국을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에 라면 끓여 먹으며 혼자 사는 게 힘들지만 좋은 경험도 된다."

―체류비는?

"교외에 작은 방을 얻어 생활비가 많이 들진 않는다. 연금이 나오고 집사람이 작은 CD 가게를 한다. 집사람이 부업을 한 것은 자녀가 셋이라 경찰 봉급으로 교육시키기 어려워서였다. 그게 이제 내 백수생활을 지탱해준다."

여기까지만 안부였다. 그를 만난 날은 검찰의 재판부 기피 신청으로 중단됐던 '용산참사' 항소심의 첫 공판(15일)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작년 말 용산 참사가 유가족에게 보상하는 조건으로 타결됐을 때 당시 경찰총수로서 어떤 심정이었나?

"미국에서 그 소식을 접했다. 돌아가신 분들이 장례식을 못 치르는 것에 대해 늘 가슴이 아팠다. 사퇴한 뒤 이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에 가서 천도재도 지냈다. 하지만 타결을 위해 유족들 1인당 7억원씩 주고 '민주열사장'을 했다.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용산 참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교훈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불행한 일'이란 인명의 죽음을 말하는가, 아니면 불법 폭력 시위를 말하는가?

"도심에서 화염병이 날아오는 불법 시위가 없어야 하고, 이로 인해 인명 피해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뜻이다. 법의 테두리를 넘어 떼를 쓰고 악을 쓰고 폭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불법 행위를 한 측이 7억원씩 받은 것이 됐다. 목숨의 가치에 비해 돈이 많다는 뜻은 아니다. 이 불행한 사태의 교훈이 없어진 것이다."

김석기 전 경찰청장 내정자는“당시 내 진퇴문제로 국회가 파행될 것 같아 자진 사퇴했다”고 말했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타결 후 오세훈 서울시장은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워온 유가족의 비통함을 이제나마 풀어 드릴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했고, 정운찬 총리는 정부를 대신해 일종의 사과 표현을 했다.

"정치하는 쪽의 어려움은 알지만 이는 잘못된 선례를 또 남긴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걸리고 힘들더라도 원칙대로 해결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바랐다."

―용산 참사가 경찰의 '성급한' 진압으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었다. 검찰 수사기록에도 "현장 상황을 잘 전달받았다면 진압을 중단시켰을 것"이라는 경찰 현장 책임자의 진술이 나온다. 과연 농성 하루 만에 진압한 게 옳았나?

"당시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시위대는 한강로 도로변 건물을 점거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도로에는 시간당 약 5000대 차량이 달린다. 만약 진압을 지연해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봐도 괜찮은가. 당시 현장 지휘관들은 진압작전에서 똑같은 견해였다. 검찰 조사에서 다른 식의 얘기를 왜 했는지 알 수 없다. 경찰은 정당한 업무를 수행했다. 안전하게 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경찰관이 들어오는 통로에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질 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진압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5명이 돌아가셨고, 고(故) 김남훈 경사가 꽃다운 나이에 숨졌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경찰의 과잉진압'이라는 의견서를 법정에 제출했다.

"당시 동영상을 봤지 않는가. 도로로 화염병이 날아오고 그걸 피하려고 택시가 곡예운전하는 것을…. 농성자들의 화염병 투척으로 선량한 시민들의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면 인권위는 뭐라고 할 것인가. '경찰이 왜 빨리 제대로 진압하지 못해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도록 방치했느냐'고 하지 않았을까."

―농성 세입자들은 삶터에서 쫓겨나는 우리 사회의 약자였다. 이들의 생존권은 제도와 절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건물로 올라가 농성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이 있었을까?

"제도적으로 대화가 잘 돼서 타협이 됐다면 가장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남의 건물을 점거하고 지나가는 다른 행인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은가."

故김남훈 경사 장례식에서.
―만약 김 전 청장이 같은 세입자로서 그렇게 '막장'에 몰렸다면?

"나도 서울 봉천동에서 살고 있고 전세를 오래 살았다. 그분들의 입장을 잘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도 사회 약자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하고 배려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건 경찰이 존재하는 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족과의 합의는 이뤄졌으나 아직 법적 절차는 끝나지 않았다. 공교롭게 '용산참사' 항소심 첫 공판이 지난 15일 열렸다.

"항소심이 진행되는지 모르고 들어왔다."

―항소심에서 1심 판결(농성자 유죄)과 달리 경찰의 과오가 인정되면 어떻게 할 건가?

"경찰의 법집행이 잘못됐다는 판결이 내려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 만약 그런 판결이 내려지면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때 당신이 경찰청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제까지 기다릴 건가. 화염병이 날아와 선량한 시민이 죽었다면 누가 책임질 건가'라고. 뜻하지 않은 인명사고가 난 결과 때문에 법집행이 잘못됐다고 한다면, 어느 경찰이 소신껏 법집행을 하고 위험에 나서겠는가."

―법정에서 김 전 청장을 참고인으로 부르지 않았나?

"1차 공판 때 미국에 있는 관계로 불출석 사유를 냈다. 사실 그때 들어올까 말까 했다. 주위에서 '뭐 시끄럽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렸다. 이번 항소심에서도 부른다면 솔직히 출석할 용의가 있다. 난 당당하게 얘기하겠다. 미국 경찰에게 수도 워싱턴 안에서 건물을 점거하고 화염병을 던지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답변은 아주 심플했다. 발포했을 것이라고 했다. 난 뉴욕 맨해튼 경찰서도 들어가 보고, 신고받고 출동하는 현장, 집회 현장, 경호현장도 직접 가봤다. 집회가 있으면 폴리스라인을 치고 기다린다. 그 선을 넘으면 사정없이 경찰봉으로 치고 팔을 꺾고 수갑채운다. 상대가 흉기를 들고 저항하면 총으로 쏜다. 그걸로 상황이 끝난다. 누구도 딴소리를 하지 않는다."

―미국 경찰은 그것이 가능하고, 한국 경찰은 왜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미국은 그런 법집행에 대해 언론도 국민도 법원도 인정해준다. 상대가 법을 어겼으니 경찰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며 힘을 실어준다. 그게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을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 경찰을 서울에 데려와 불법 시위를 막으라고 하면 쩔쩔맬 것이다. 작년 촛불시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 도심을 점거하고 '청와대로 쳐들어가자', '누구 물러가라'고 했다. 경찰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경찰버스 70여대가 부서졌다. 하지만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법시위대가 다치면 '경찰이 선량한 시민을 다치게 했다'며 질타한다."

―작년 촛불시위 때 서울 도심이 두 달 이상 '해방구'가 됐다. 밤이면 시위대는 차도에 앉아 족발을 놓고 술을 마시고 춤추고 놀았다. 경찰은 '명박산성'이라는 컨테이너를 쌓고 수세적 방어만 했다. 당시 경찰지휘부가 가장 고려한 것은 '혹시 인명사고가 나 시위대 중 한 명이라도 죽으면 정권이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때 경찰 지휘부가 왜 그렇게 판단했겠는가. 진압 능력이 없어 그런 게 아니었다. 경찰의 법집행에는 정치권과 여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당시 지휘부가 교체되고 내가 서울경찰청장이 된 뒤 '강력하게 진압해라' 지시했다. 어떤 불상사를 우려해 멈칫멈칫 수세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촛불시위가 진정됐다."

―정말 그런 진압으로 인명 사고가 발생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데 정당한 직무 수행으로 불상사가 생긴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인명사고가 나지 않기를 최대한 바라겠지만, 그걸 감수하지 않는다면 법질서 확립이 안 된다. 경찰이 정당한 법집행을 했는데 만약 책임을 지라면 내가 지겠다고 했다."

―촛불시위의 발단에는 현 정권의 국민과의 소통 부족도 있었다. 경찰은 마치 정권의 불리한 부분을 막아주는 '방패' 노릇을 하는 것처럼 비쳤을 수 있다.

"내가 서울경찰청장으로 발령났을 때, 기자들이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겠네'라고 했다. '연일 도심을 불법 점거하고 경찰을 구타하고 있는데 이 무질서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는가. 대통령과의 코드가 아니라 국민과의 코드다. 국민이 경찰에게 그런 역할을 맡긴 게 아닌가. 내 모든 걸 걸고 바로잡겠다'고 했다. 시위가 진압된 뒤에도 '범법자는 전원 검거해라. 특히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납치하고 화염병을 던진 시위대는 반드시 검거해라'고 강조했다. 경찰이 짓밟히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 국민이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경찰청장으로 내정됐을 때, 일본 신문에서도 유례없이 대서특필한 걸 기억한다.

"내가 경감 시절 일본 경찰대학 본과에 연수했다. 유일한 외국인이었고, 동기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뒤로 오사카 총영사관과 일본대사관에서 6년을 근무하면서 이들과의 좋은 인연이 계속됐다. 내가 청장에서 사퇴한 뒤 내각정보관(국정원장)과 도쿄경시총감, 동기생들이 '위로해줘야겠다'며 일체의 비용을 들여 우리 부부를 일본으로 초청했다. 최고급 호텔과 차량을 제공하고 매일 저녁 만찬을 열어줬다. 전혀 생각지 못한 환대였다."

―용산 참사 이후 청와대와 여당 안에서도 '김 전 청장이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청와대 누구도 내게 그만두라고 언질을 주거나 얘기한 사람은 없었다. 나 스스로 그만둔 것이다."

―그 전에 김 전 청장은 자신의 거취문제와 관련해 '임명권자에게 맡겨야지 내가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스스로 그만둔 건가?

"당연히 고위공직자가 진퇴문제를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 고민을 많이 했다. 전국에 있는 경찰관들이 메일과 편지와 전화로 '그만두면 안 됩니다'고 했다. 그런데 야당에서 나를 사퇴시키지 않으면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겠다고 했다. 나 하나의 진퇴로 국회가 파행될 가능성이 많다고 봤다. 그런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통령 고민도 더 깊어질 것이고, 내가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청와대에서 나를 그만두라고 한 적은 없다."

―통상 고위직에 물러나면 민간기업에서 '고문'으로 오라고 부를 텐데.

"그런 제의를 받았고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사양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그만두고서 후배들에게 신세 지거나 부담되는 처신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점심을 거른 채 맹렬하게 맞붙었다. 다음날 그는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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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서 자진 사퇴했던 김석기 전 경찰청장 내정자를 만났다 /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