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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중공군 “북조선에 가보고 싶어요!”

화이트보스 2010. 7. 5. 14:18

한국전 참전 중공군 “북조선에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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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왕펑허(王鳳和), 올해 81살입니다.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단 120사단 358여단 고사기관총 사수 겸 분대장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리슈궈(李樹國), 올해 77살, 전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단 118사단 353여단 고사기관총 사수로 1950년 10월 28일 항미원조 작전에 참가했습니다.”
중국 동북 지역인 지린(吉林)성 농안(農安)현에 있는 ‘펑잉(鳳英)영예군인원’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 출신 노병들이 모였다. “우리는 조선에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시 전투하던 진지를 보고 싶습니다! 열사들의 묘소를 찾아보고, 이국땅에 영원히 묻혀있는 전우들을 보고 싶습니다…”
60년전 오늘(1950년6월25일) 조선전쟁이 폭발했다.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조선전쟁 확전과 동시에 미태평양 제7함대에게 대만해협 진격을 명령해 중국 내정에 난폭하게 간섭했다. 9월15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해 38선을 넘어 전화가 압록강변까지 이르렀다.
그해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870만 톤, 중국은 단지 61만톤에 불과했다. 미군 한 개 사단에는 959개의 대포와 140여 대의 탱크, 3800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지원군은 한 군단에 단지 522개 대포와 100여 대의 차량이 임시 배치됐을 뿐, 탱크는 없었고 제해권과 제공권 역시 갖지 못했다.
1950년 10월19일 밤, 중국인민지원군 4개 군단와 3개 포병사단 총 26만명이 제공권도 갖추지 못하고 안둥(安東, 현재 단둥)을 통해 압록강을 건넜다. 참전이 시작된 것이다.
참전 부대는 290만 명, 2년9개월동안 용감하게 전투를 치뤄 중-조군대는 미군을 정전협정에 사인하게 만들어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미군 총사령관 마크 W 클라크 장군은 “역사상 승리없는 정전조약에 서명한 첫 번째 미국 육군사령관이라는 불명예”를 지게 만들었다. 펑더화이(彭德懷)는 “이는 서방 침략자들이 수백년간 동방의 해안에 몇 개의 대포를 동원해 한 국가를 패점하던 시대가 다시 반복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증명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후 신중국은 긴 시간동안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화환경을 얻을 수 있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항미원조기간동안 동북지구에서만 40여만 명이 참전했고 남쪽의 광저우에서도 대학생, 중학생 입대 열기가 불어 “2만2000명이 군대 간부학교에 등록해 3338명이 합격해 각각 육군, 공군, 통신병, 철도병 등으로 수송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포화가 처연한 조선의 전쟁터에 13만3000여명의 중국 여성들이 침략자를 타격하고, 조국을 보위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걸고 참전했다.
 

이상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은 지난달 6월25일자 중국 ‘광주일보’의 ‘조선전쟁 발발 60주년’ 특집면에 실린 기사의 내용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는 24일 한국전쟁 60주년 대형 특집 기획에서 북한이 먼저 남쪽을 침략했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했다가 한국 언론의 확대보도가 이어지자 인터넷에서 기사를 삭제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은 ‘북한을 도와 미국과 싸운(항미원조)’ 전쟁이며 미국과 대비해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신생 공산국가가 이웃 국가를 도와 적지않은 타격을 주고 승리한(패배하지 않은) 전쟁이다.
우리에게 중공군은 당시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도움으로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에 성공해 통일이 손안에 거의 들어왔던 것을 빼앗아 간 ‘철천지 원수’로 오랫동안 인식돼왔다. 근래 10~20년간 통일안보 교육이 약화되고, 한중 수교 이후 중공대신 중국으로 인식되면서 잊었던 사실을 중국은 여전히 각인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일보’ 기자가 당시 참전 중공군 노병과 인터뷰 한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얼마 전 조선으로 가는 관광전용 열차가 뚤린 이후, 그들의 바램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에 가고자하는 꿈은 단지 희망에 불과하다.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돈이 없어요!” 한 노병이 탄식하며 말한다. 이 노전사들은 매월 국가 민정부문에서 주는 300위안(한화 5만1000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수입이 없다. 게다가 이들은 도와주는 이 없이 자기 힘으로는 집 밖을 나설 기력도 없는 상태다.”
기자의 기사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이 작은 군인 요양시설에서 “일찍이 중국인민지원군전사들이었던 이들의 60년전의 기억, 60년전의 영광, 60년동안의 자부심을 모아 기록해 보전한다.”

돌이켜 우리를 보자. 특히 올해 우리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영웅담을 많이 발굴해 기록 전파 보존했다. 이 노병들이 60년전 총부리를 겨누며 서로의 조국을 위해 싸웠던 중국의 노병들도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갖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들이 함께 처절하게 다퉜던 운산, 대관령에서 그때의 노병들이 악수하며 당시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자리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공자가 지은 『춘추』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릇 군대를 동원함에 종과 북을 사용하는 경우를 정벌[伐]이라고 하고,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침공[侵]이라고 한다.” 『주례』는 또 이렇게 말한다. “현인을 해치고 백성을 해치면 정벌[伐]한다. 험하고 견고함을 믿고 불복종하면 침공[侵]한다”
6·25는 명분없는 전쟁 즉 ’침공’으로 시작됐음은 분명하다. 전쟁이 발발한지 이제 60년 한 갑자(甲子)가 지났다. 침벌 논쟁도 중요하다. 하지만 늦기전에 출구전략을 수립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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