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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대성의 경주 묵은당과 통천옥

화이트보스 2011. 5. 10. 18:23

① 화가 박대성의 경주 묵은당과 통천옥[중앙일보] 입력 2011.03.14 00:10 / 수정 2011.03.14 00:10

뒤뜰로 난 창 안으로 신라의 풍경이 들어왔다

생활칼럼니스트 김서령의 집 이야기를 시작한다. 잘 지은 남의 집을 구경하자는 뜻도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다시 살펴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집은 우리 삶을 담는 그릇이다. 동시대 다른 사람의 집을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내 삶의 재점검이기도 할 터다.

집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하면서 자다가도 첫 집을 어느 곳으로 할까 이리저리 짚어보면서 모처럼 설레었다. 주인이 직접 지었으면 좋겠고 너무 으리번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전통주택의 문법을 염두에 뒀으면 좋겠고 집에 대해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은 주인이면 좋겠다 싶었다. 나는 그런 잣대를 두루 만족시키는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경주다! 불국사를 그리는 신라화가 박대성(66)의 집으로 가자.

글=김서령, 사진=김성룡 기자


화실에서 작업 중인 박 화가. 커다란 창 뒤로 보이는 뒤뜰이 그림 같다.

박대성 화가의 경주 배동 집 뒤뜰. 석탑 뒤로 보이는 정자가 묵은당. 그 왼쪽 옆에 이어 지은 작은 집이 통천옥이다. 앞에 보이는 연못은 박 화가가 2005년 만든 연못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언양 방향으로 가면 나정을 지나 포석정을 지나 삼릉이다. 경북 경주시 배동 박대성의 집 뒤뜰은 삼릉과 잇닿아 있다. 남산 삼릉골의 소나무들은 완벽한 조화가 뭔지를 웅변하며 서 있었다. 배병우가 사진 찍어 세계인의 심금을 두드린 바로 그 둥치와 곡선과 빛깔이다.

그의 집은 2600여 ㎡(800여 평) 땅 위에 자리잡고 있다. 다섯 칸짜리 옛 한옥과 165㎡(50평) 규모의 화실이 주 건물이다. 우린 그의 화실에서 뒤뜰을 내다봤다. 천년송과 수십만 년 묵은 괴석을 배경으로 작은 건물이 두 채 놓여 있다. 대나무로 지은 묵은당(墨隱堂)과 흙으로 지은 통천옥(通天獄).

“그 그림 누가 그렸는지 참 잘도 그렸다!” 일행 중 누군가 탄복했다. “7세기 김대성의 솜씨인가, 21세기 박대성의 솜씨인가.” 질세라 나도 추임새를 넣었다. 그랬다. 그건 그림이었다. 한국화가 박대성의 작품이다. 그는 1970년대 국전에 내리 여덟 번 입선하고 79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박대성은 걸핏하면 집을 짓는다. 서울 평창동 집도, 10년을 묵으며 작업을 했던 경기도 팔당 집도 여러 번 짓고 고쳤다. 그림 말고도 뭔가 짓고 만들지 않으면 좀이 쑤셔 못 견딘다. 통천옥이 그가 열 번째 짓는 집이라니 웬만한 건축가 뺨칠 만한 건축 경력이다.

박대성은 1999년 불현듯 경주로 거처를 옮겼다. “신라의 잠을 깨우러 왔다”는 거창한 이유는 실은 농담이다. “좋은 데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 그를 경주로 이끌었다. 옛 한옥을 사 고쳐서 살던 그는 2005년 화실을 지었고, 3년 전엔 너른 화실에서 내다보기 위한 용도로 묵은당을 지었다. 5㎡(1.5평) 남짓 아담한 크기의 정자다. 누마루에 올라앉아 눈앞의 댓잎과 솔바람을 오관으로 느끼는 것이 정자의 효용이겠지만 저만치 세워놓고 바라보는 정자 또한 그에 못지않다는 데 나는 쾌히 동의한다.

“뜰은 뒤뜰이 중심이거든. 앞뜰이야 지나가는 사람을 위한 싱거운 것이고 주인이 즐기는 것은 당연히 뒤뜰이지. 창덕궁 후원을 봐. 문 열어놓고 가만히 앉아서 내다보는 뒤뜰이 조선집의 참맛이라고.” 그러고 보니 옛집엔 아무리 작아도 뒤뜰이 필수였다. 뒤 바라지를 열면 거기 자그마한 다른 세상이 펼쳐졌었다. 땅이 비싼 도시에 살면서 우린 뒤뜰을 잃었다. 무연히 내다볼 뒤뜰을 잃으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재됐던 통찰과 여유와 미감을 덩달아 잃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1 통천옥 내부. 천장 한가운데 구멍을 뚫어 유리를 끼웠다. ‘하늘과 통한다’는 뜻에서 집 이름이 ‘통천옥’이다. 2 묵은당에서 화실을 바라본 풍경. 3 앞뜰에 설치한 돌확 연못.
묵은당은 죽루(竹樓)다. 왕대나무 기둥에 골기와 맞배지붕이 이어진 자그마한 정자로 작은 누마루를 가졌다. 바닥도 천장도 다 대나무다. 그러나 대(竹)만으로는 2t이나 되는 기와지붕의 하중을 버틸 수가 없으니 대나무 안에다 스틸을 넣어 골조를 세운 후에 겉을 대나무로 감쌌다. 그래서 공사도 간편했고 몇백 년을 버틸 만큼 튼실해졌다.

묵은당 곁에 황토와 기와를 번갈아 쌓아 올린 자그마한 집의 이름은 통천옥이다. 통천옥 역시 5㎡(1.5평).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문설주나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낮고 작은 방으로, 2009년 지었다. 골기와로 지붕을 얹고 가운데를 뚫어 유리를 끼웠다. 자궁처럼 아늑해 절로 몸이 슬금 눕는다. 누워서 보니 천장 가득 꽃망울 진 매화가지다. 그 위로는 삼릉의 푸른 솔잎이다. 이 방은 둥글지도 네모나지도 않다. 바닥에 구들을 깔고 아궁이에 장작을 땐다. 튀어나온 아궁이가 거북 머리라면 방의 형태는 거북 몸통이다. 양쪽에 난 길쭉한 창은 영락없이 거북의 눈이다.

“하늘로 뚫렸다고 통천옥이지. 옥은 집 옥자가 아니고 감옥 옥자야. 세상 끊고 감옥에 갇혀야 뭔 일이 돼도 되거든. 거북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곳? 두말할 것 없이 거북의 이상향이지. 마침내 도달해야 할 구품연지(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든 불교 사찰 안의 못)지.”

그는 집 여기저기 연못을 파뒀다. 거기 연을 길러 향도 맡고 잎과 뿌리를 차와 반찬으로 먹지만 더 큰 것은 거북의 이상향으로서의 기능인가 보다. 묵은당과 통천옥은 거들 사람 하나 사서 혼자 지었다. 한 집에 일주일쯤 걸렸고 비용은 대략 각각 500만원쯤 들었다.

아파트가 흔해졌다. 수백 명 주소록을 들여다보면 80% 이상이 아무 아무 아파트다. 아파트란 스스로 뭘 지어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언제든 저런 조그만 집 하나 짓자는 꿈조차 못 꿀까.

“새 둥지를 한번 보라고, 짐승의 굴을 봐. 몸 눕히는 집은 작아야 되거든. 그래야 안식처가 될 수 있어. 집이 너무 크면 휴식이 안 돼. 그래서 자꾸 병이 나는 거라고. 전신만신에 집 키우느라 인생을 낭비하잖아? 그 때문에 뇌물 받고 과로하고, 자연이 자꾸 가르쳐주는데도 다들 외면하고 있지.”

지금 박대성은 통천옥에 누웠다. 전기를 들이지 않아 양초와 호롱으로 불을 밝힌다. “쉴 때는 너무 밝은 것도 좋지 않아.” 그러면서 심신을 텅텅 비운다. 그래야 다음 작업을 위한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우물에 물 고이듯 차란차란 차오른다는 것을 자연이 가르쳐줬으니까!

김서령(55)씨는 경북대 국문과를 나와 교사, 신문·잡지사 기자로 활동했다. “그 사람을 알려면 찻집에서 세 시간 이야기를 듣느니 살림집에 30분 가보는 편이 훨씬 낫다”는 소신을 갖게 되면서 남의 집 구경을 즐기게 됐다. 2003~2004년 중앙일보 연재를 모아 낸 『김서령의 가(家)』와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여자전』 『안동 장씨 400년 명가를 만들다』 등의 저서가 있다.

가는 곳마다 연못을 파는 이유는 …

박대성 화가는 “물이 없는 곳엔 생명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연못을 팠다”고 한다. 그의 경주 집에는 연못이 3개나 있다. 하나는 자연산, 나머지 2개는 인공 연못이다.

 뒤뜰에 만든 연못은 크기가 가로 1.5m·세로 3m, 깊이는 40~50㎝ 정도다. 혹 사람이 빠져도 생명엔 지장이 없는 깊이로 만들었다. 마사토(입자가 굵은 모래흙)로 이뤄진 땅이라 삽으로 작업할 만했다. 구덩이를 판 뒤엔 물이 새지 못하도록 구덩이 바닥과 벽에 콘크리트를 발랐다. 따로 방수 처리는 하지 않았다. “물이끼가 생겨 자연방수가 된다”는 게 박 화가의 설명이다.

 4~5일 정도 콘크리트가 굳기를 기다린 뒤 흙과 물을 넣어 연못 안을 채웠다. 흙의 높이는 30㎝ 정도. 흙 속엔 거름도 잔뜩 들어갔다. 흙과 거름의 비율이 5대 1쯤 됐다. 그리고 한 달을 그냥 뒀다. 거름과 흙이 하나로 융화되고 시멘트 독이 빠질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고여 있는 물에 흙과 거름이라, 악취가 염려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물속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며 냄새를 풍긴 건 처음 일주일에 불과했다. 물은 금세 안정을 찾았고 점점 맑아졌다. 자연의 자정 능력이 놀랍기만 했다. 모기·파리가 알을 까나 했더니, 어느새 그 천적들도 자리를 잡아 해결이 됐다. 연못 가장자리는 집 짓고 남은 기와를 둘러 장식했다.

 연못이 완성된 뒤 박 화가는 연꽃을 두 뿌리 구해 꽂았다. 그리고 6년. 그동안 연못을 관리하고 손볼 필요가 없었다. 날이 가물어 물이 줄어들었다 싶으면 때맞춰 비가 내려 줬다. “그동안 한 번도 물 보충을 안 했다”니 믿기 힘든 자연의 힘이다. 심어 놓은 연꽃 두 뿌리는 1년 안에 연못을 가득 채울 정도로 빠르게 자랐다. 물고기는 사 넣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왔는지 개구리와 도롱뇽 등이 그 연못을 서식처로 삼았다.

 집 입구에 만든 연못은 가로1m, 세6m 정도 크기다. 2005년 이렇게 연못 2개를 만드는 데 당시 400만원 정도 들었다. 인부 3명을 불러 작업을 했다. 연꽃은 지인에게 얻어 따로 돈이 들지 않았다. 화원에서 사면 뿌리 하나에 5000원 정도다. 연꽃 외에 수련·창포·부레옥잠·생이가래·물토란 등이 연못에서 잘 자라는 수생식물이다.

 마당에는 골동품 ‘돌확(돌을 우묵하게 파 절구 모양으로 만든 것)’을 이용한 미니 연못도 3개나 있다. 돌확 안에 흙 넣고 물 채워 만든 연못이다. 돌확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서울 장안동·인사동 등지에서 파는 우리나라 골동품은 수십만원을 호가하지만 중국산 수입품은 10만원 이내로 저렴하다. 박 화가는 돌확 연못에도 연꽃만 심었다. 겨우내 연꽃은 꽃도 잎도 없이 마른 줄기만 수면 위로 앙상하게 내놓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울 법도 한데 박 화가 부부는 “그래도 운치 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경주=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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