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9.03 22:38
- 최유식 베이징 특파원
1990년대 중반 한국 관련 외교 문서 조사를 위해 미국 보스턴에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 도서관의 한국 관련 문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의 정상회담 기록이었다.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월남전 참전'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한국은 6·25 전쟁을 통해 잘 훈련된 장병 100만명이 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어 "분단국가 중 경제력 면에서 열등한 쪽은 모든 면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 군사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경제 개혁과 재건에 나설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말투는 간결했지만, 간절함과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박 의장의 이 제안은 1964년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은 존슨 대통령의 파병 요청으로 이어졌고, 베트남전 참전은 막 개발의 길에 들어선 한국 경제에 디딤돌 역할을 했다.
1991년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역시 절박한 처지였다. 1978년 개혁·개방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혼란스러웠다. 물가 급등과 부패 추문 속에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격해졌고, 결국 중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터졌다. 덩샤오핑은 학생 시위를 유혈 진압했지만 "계획경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당내 보수파의 거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면 돌파로 맞섰다. 중국 남방의 상하이·선전·광저우 등지를 돌며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 인민 생활 개선이 없으면 남는 것은 죽음뿐"이라며 더 대담한 실험과 돌파를 주문했다. 당시 88세의 고령이었던 그가 기차에 몸을 싣고 주파한 거리가 6000㎞나 됐다. 이것이 13억 중국인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폭제가 된 남순강화(南巡講話)이다.
북한은 소련·동구권의 몰락과 중국의 개혁 개방으로 외부 지원이 크게 줄어든 1990년대부터 여러 차례 경제 관리 개선 조치를 시행했다. 일종의 암시장인 '장마당'이 발달해 부실한 계획경제를 보완했고, 북한 경제의 버팀목인 자원 개발도 본격화됐다. 시장경제를 배우기 위해 경제 관료들이 해외로 학습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실험은 번번이 몇 년을 못 가고 중단됐다. 북한 전문가들이 '좌(左) 5년, 우(右) 5년'이라고 부르는 변덕스러운 정책 때문이었다. 당장 경제가 곤란할 때는 개혁에 나섰다가, 다시 먹고살 만해지면 기존 체제의 관성(慣性)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됐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시장경제를 안다는 북한 관료들은 줄줄이 숙청을 당해 지금은 북한에서 제대로 된 경제 전문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집권 이후 경제 발전과 민생 개선을 '당이 분투하는 목표'라고 했다. 미키마우스 공연을 보고 여성에게 자전거 타는 것을 허용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보 어디에서도 절박함과 간절함을 느낄 수 없다. 그런 덕목 없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