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물질 과시하는 결혼문화 깨야… 유엔총장까지 이례적 동참

화이트보스 2012. 11. 2. 10:49

물질 과시하는 결혼문화 깨야… 유엔총장까지 이례적 동참

  • 김수혜 기자
    • 이메일

  • 입력 : 2012.11.02 03:08

    6부―<30> 반기문 유엔총장, 사돈에 이어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
    장관 때 대통령도 모르게 두 딸 결혼시키고 업무 봐
    "해외선 작은 결혼 훨씬 많아… 우리 결혼문화도 성숙해져야"

    반기문(68)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김금래(60) 여성가족부 장관과 만났다. 반 총장은 소탈한 미소를 띤 채, 김 장관이 건넨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 캠페인 증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결혼식에는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청하고, 예물·예단은 간소하게 준비하고, 신혼집은 양가가 형편에 맞춰 분담하고…. 허허, 저는 이미 다 실천한 내용입니다."

    김 장관이 "앞으로도 (작은 결혼식의 의미를) 주위에 널리 알려달라"고 하자, 반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이라고 또박또박 만년필로 증서에 서명을 했다. 유엔사무총장이 언론사가 주도하는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도 국격(國格)에 걸맞은 성숙한 결혼 문화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에 절실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반 총장 곁에서 일한 사람들은 그를 두고 "007 영화처럼 자식들을 결혼시킨 사람"이라고 한다. 반 총장은 2004~2006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일할 때, 큰딸 선용(42)씨와 막내딸 현희(37)씨를 차례로 결혼시켰다.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뒤 2009년 외아들 우현(38)씨를 장가보낼 때도 뉴욕의 한 오래된 성당에서 가족·친지만 초청해 조촐하게 예식을 치렀다.

    "저도 물론 평생 공직자로 살면서 축의금을 수없이 냈지요. (하지만 큰딸 결혼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사돈도 일절 말씀을 안 하셨어요. 대통령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지난달 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반기문(오른쪽) 유엔 사무총장이 김금래 여성가족부 장관과 자신이 직접 서명한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 캠페인 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반 총장은 한국의 고비용 결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해 동참했다고 밝혔다. /이태경 기자
    큰딸 결혼식 당일도 반 총장은 업무를 봤다. 그는 "그날 외국 대표들이 서울에 와서 회담을 했는데, 7개국 대표가 차례로 나와서 연설을 하니까 어찌나 길어지던지…" 하고 웃었다. 반 총장은 혼자 속 태우다가 연설이 끝나자마자 "긴급 일정이 있어 오찬에 참석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한 뒤 부리나케 회담장을 빠져나와 예식장으로 달려가 혼주석에 앉았다.

    막내딸 현희씨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사무소에 근무하다가 인도인 신랑과 사랑에 빠졌다. 2006년 반 총장은 아프리카 출장에 맞춰 딸의 결혼식 날짜를 잡았고, 일요일에 조용히 예식을 치른 뒤 월요일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무(公務)를 봤다.

    반 총장은 "해외에도 어마어마하게 결혼식 올리는 갑부들이 물론 있지만, 작은 결혼식 올리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다"면서 "(우리나라도 작은 결혼식 실천한 사람들이) 나뿐만 아니라 많다"고 했다. 반 총장은 이날 모임에 배석한 김숙(60) 주(駐)유엔대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여기 앉아계신 김 대사도 한국에 들어오기 며칠 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녀를 결혼시켰다"고 했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들은 "그동안 우리나라는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도 '잘난 척한다'고 욕먹을까 봐 할 수 없이 남들처럼 무리해서 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반 총장이나 김 대사 같은 분들이 늘어날수록, 일반 국민들도 용기 있게 작은 결혼식 실천하기가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