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모두 정말 기뻐했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총 메고 파주에 왔었는데 이제는 중국과 한국이 다들 친구가 됐다.”
그는 종전 당시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천은 1955년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세월은 60년을 넘어섰지만 천의 사진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았다. 50점의 사진에는 전쟁 상황과 상감령 전투 현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등이 담겼다. 중국 여군 전우와의 기념사진도 보인다. 한·중문화협회와 함께 이들을 초청한 경기도는 전쟁 사료로서 가치를 높게 사 천의 사진첩 복제를 요청했다. 1953년 초 참전한 천은 그해 7월 정전된 후에도 북한에 남아 2년간 복구사업을 도왔다. 함께 참전한 여군은 10여 명으로 극소수였다
한국전쟁에 자원했던 량덩가오(梁登高·78)는 한국전쟁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박격포탄이 날아다니고 사방은 회색 연기로 뿌옇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가 확보될 때쯤이면 뒹구는 시체들이 보였다. 1년 늦게 입대한 친구가 먼저 사그라져 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참혹’이란 단어 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량은 60년 만에 찾은 한국이 마냥 신기한 듯했다. 그는 “총대를 메고 파주 마장리까지 와 보긴 했지만 이렇게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서울 땅을 밟게 될 줄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10일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52년 운전병으로 참전한 라이쉐셴(賴學賢·85)은 전사자명비 앞에 서서 한참을 떠날 줄 몰랐다. 최고령인 라이는 53년 정전협정이 연장되면서 그해 봄 최후의 대규모 군사작전인 춘반등륙작전과 하계반격전투에 참여했다. 라이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총을 겨누던 사이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남북은 지금도 하나였을 것”이라며 “조속히 평화 통일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의도의 한 삼계탕집에서 이뤄진 점심식사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천뤄비는 “한·중 수교가 이뤄지던 92년부터 꼭 한 번 한국에 와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꿈이 실현됐다”며 “감사합니다”라는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인삼주 건배사를 제안했다. 천은 “20년 먼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도 공군 출신이었다”며 “제대 후 초등학교 수학 교사로 시작했는데 군 출신의 운동신경을 못 속여 이후 체육을 담당하게 됐다”고 했다. 량덩가오도 “맛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등 한국어를 선보였다.
글=민경원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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