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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前 駐월남 공사]

화이트보스 2013. 9. 9. 13:46

'월남전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前 駐월남 공사]

김구·이승만의 독립운동 가르치다 반동으로 몰려 아버지 두고 北탈출
越南戰 땐 탈출기회 마다… 교민 지켜, 北 귀순 회유 버티고 감옥 생활 5년

"6·25 때 국군의 첫 승리 안겨준 춘전 전투 겪고 얻은 자신감 때문… 인생에서 첫 勝 경험 무엇보다 중요"

"나에게 나라 위해 칠난팔고(七難八苦)를 주시고 이를 극복하는 힘을 얻게 해주소서!"

이대용(88) 전 주월남(남베트남) 공사는 1947년 6월 29일 북한을 탈출하며 기도했다. 황해도 금천 인민학교(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김구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반동'이 됐다. 고향에 아버지를 두고 떠나야 했다.

그의 '기도'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 교민철수본부장을 맡으며 이뤄졌다. 수차례 탈출 기회가 있었지만 교민을 먼저 철수시켰고 북베트남군에 체포돼 5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그가 1980년 4월 베트남에서 귀국하자 청와대로 불러 "교민을 최후까지 지켜냈고 감옥에서도 지조를 지킨 영웅"이라고 치하했다. 그는 '월남전 최후의 탈출자'였다.

지난 5일 서울 을지로 '자유수호국민운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 전 공사는 고령에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남베트남 패망을 통해 본 한국 안보'라는 주제로 9일 한국안보문제연구소에서 열리는 강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매일 아침 국민체조를 하고 팔굽혀펴기 36개를 한다"는 그였다.


	이대용 전 주월남 공사가 공산 베트남 감옥 수감 당시 북한 공작원을 향해 취했던 태권도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대용 전 주월남 공사가 공산 베트남 감옥 수감 당시 북한 공작원을 향해 취했던 태권도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진한 기자
이 전 공사는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대장으로 군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6·25 때엔 6사단 7연대 소속 중대장으로 춘천에서 첫 승전을 일궜다. 전후 군 엘리트로 승승장구했다. 1960년 미 육군참모대를 졸업했다. 1963년부터 4년 동안 남베트남에서 한국 대사관 무관을 역임해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를 1973년 남베트남 주재 공사에 임명했다. 이 전 공사는 남베트남 마지막 대통령인 응우옌 반 티우와 미 태평양지구합동참모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였다.

남베트남 패망 하루 전 1975년 4월 29일 아침 사이공(현 호찌민시) 한국 대사관 건물이 북베트남군의 빗발치는 포성으로 흔들렸다. 이 전 공사는 기밀문서를 소각한 후 철수 집결지인 한 아파트 옥상으로 갔다. 하지만 대사가 직원들을 이끌고 미국 대사관으로 간 뒤였다.

미국 대사관엔 한국 대사관 직원뿐 아니라 교민까지 260여명이 모여 있었다. 미 해병대는 별관 정원에 사람들을 대기시킨 후 120명씩 본관으로 들여보내 헬기에 태웠다. 미국·필리핀·태국인 등도 있었다. 10시간을 기다렸지만 한국인 차례는 오지 않았다. 미국 베넷 공사에게 한국인을 먼저 보내달라고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미국 공사가 저더러 지금 혼자 옥상에 올라가 (요인을 위한) 헬기를 타라고 하더군요. 교민들을 버려두고 혼자 헬기를 탈 수는 없었어요."

다음 날 새벽 4시 30분 미군은 철수 작전을 중단했다. 이 전 공사는 교민 160여명을 이끌고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낮이 되자 북베트남군이 외국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우리 국민을 살렸으니 이제 죽어도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1964년 주월남 무관이었던 그가 월남군 장군을 접견하는 모습.
1964년 주월남 무관이었던 그가 월남군 장군을 접견하는 모습. /이대용씨 제공
살아남은 교민들은 한국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이 전 공사는 한 주택에 억류됐다가 같은 해 10월 체포됐다. 한국의 고위 외교관을 포섭하려는 북한 측 공작이었다. 사형수로 치화형무소에 수감됐다. 하루 두 끼 식사는 주먹만 한 밥과 멀건 호박국이었다. 몸무게는 78㎏에서 42㎏으로 줄었다. "배고픔에 엿가락 생각이 간절하더라고요."

북한에 귀순하라는 회유가 잇따랐다. 그는 공산화된 베트남 수사관이 "진보적 민주주의(공산주의)에 가담하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할 때마다 "그따위 협박 두렵지 않다"고 맞받아쳤다. 1978년 9월엔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요원들이 구타하려고 할 때엔 "때릴 테면 때려 봐"라며 태권도 자세를 취했다. "태권도 2단이라 수도(手刀) 격파와 오른발 옆차기에 위력이 있었어요. 당시 공작원 한 명이 (1994년 남북협상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박영수라는 걸 나중에 알았죠."

이 전 공사는 감옥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춘천 지구 전투'라는 책자를 꺼냈다. 6·25전쟁 초기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벌어졌던 전투 기록이었다. 남침 직후 한국군이 거의 전 전선에서 패배하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승리한 첫 전투였다. 이 전투에 그는 6사단 7연대 소속 중대장으로 참가했다. 그는 2011년, 당시 기억을 더듬고 전우를 인터뷰해 100쪽짜리 책자를 완성했다. 책에는 그가 손으로 그린 전투 상황도가 들어가 있었다. 그는 춘천 지구 전투 승리 이후 연이어 승전했고, 북진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이 전 공사는 "춘천 승리 이후 삶의 모든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며 "첫 승리 경험이 인생을 사는 데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