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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로비

화이트보스 2016. 8. 15. 17:50

예산 로비

입력 : 2016.08.15 06:22

국회의원이 부르는데 "바쁘다"고 거절해도 뒤탈이 안 난다. 불과 반나절 사이 전국의 특별·광역시장, 도지사 모두에게 청탁 전화를 받기도 한다. 1급 차관보인데 청와대가 웬만한 장관보다 인물 선정에 더 신경을 쓴다. 그 자리 맡으려고 차관급도 '강등'을 감수한다. 김영삼 정부까지는 대통령과 독대(獨對)해 합격점을 받아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목에 힘깨나 주는 관료들이 많지만 이런 특급 대우를 받는 건 딱 한 명, 예산실장뿐이다.

▶나랏돈 규모와 쓸 곳을 정하는 기획재정부 예산실은 '갑(甲) 중의 갑'이다.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할 일이 없다. 해마다 9월 예산안을 국회에 넘기기 직전 한두 달 동안 정부 부처, 국회, 지자체, 공기업에서 온갖 청탁이 줄을 잇는다. 지역과 기관을 가리지 않고 한 푼이라도 돈을 더 타내려고 예산실에 찾아와 치열한 로비전을 벌인다. 요즘도 정부 세종청사에선 예산실 직원 한 사람이 하루 수십 명, 많게는 백 명 넘는 민원인을 만나 얘기를 듣는다.

▶매년 총성 없는 예산 쟁탈전이 벌어지지만 전두환 정부 땐 실제 총이 등장했다. 육군 준장 두 명이 권총을 차고 예산실에 찾아가 "군을 뭐로 알고 예산을 깎느냐"고 을러댔다. 대통령은 두 장군을 좌천해 예산실 체면을 세워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 땐 장관급 인사가 예산 민원을 풀어보려고 예산실 주사급 실무자를 찾아갔다. 직원은 그 장관을 실무자로 여겨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가 나중에 알고 사과했다. 십여 년 전엔 예산실 간부가 친상(親喪)을 지방에서 치렀다가 하도 문상객이 많아 그 도시 조화가 동나기도 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가 지난 주말 치킨 100마리와 수박 스무 통을 들고 예산실에 가 야근 직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정 원내대표는 "추경에다 본 예산까지 짜느라 밤샘하는 직원들을 위로하러 다녀왔다"고 했다. 정부 부처 출입 기자를 10년 넘게 했지만 여당 지도부가 공무원들에게 간식 돌렸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지역구 민원 해결하려고 공들이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돈에는 꼬리표가 없지만 모든 예산에는 로비의 꼬리표가 붙어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갑 중의 갑' 예산실 직원들도 예산 철엔 밤샘을 밥 먹듯 한다. 과로로 병원 신세 지는 이도 숱하다. 그래서 젊은 공무원들은 갈수록 예산실을 꺼린다. 내년엔 400조원 안팎 '수퍼' 예산을 편성하기로 하면서 예산 쟁탈전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예산 로비 풍경을 볼 때마다 세금이 과연 제대로 쓰일지 걱정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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