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속도'에 저항했던 부탄의 지금은김진주 입력 2018.02.10. 16:05 수정 2018.02.10. 16:25
※편집자주: 다만세는 ‘다시 만난 세계’의 줄임말입니다. 국제뉴스에서 소외됐던, 그러나 흥미로운 나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연재입니다.
제2차 산업혁명 이후 대부분의 나라가 기술의 발전에 따른 풍요를 추구하는 사이 문명의 속도를 거부한 채 ‘느리고 편한 삶’을 추구하는 나라가 있다. 지방에선 대부분의 수송이 등짐이나 노새에 의해 이뤄지는 것은 물론, 수도(首都)에도 교통신호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느리게 사는 삶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부’는 중요하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가 3년 마다 선정하는 최빈개발도상국(LDC)에 속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신 자체적으로 개발한 국민행복지수(GNH)로 매년 국민들의 행복여부를 살피는데, 이 결과엔 매우 민감하다. 모든 정책의 최우선 고려사항도 ‘국민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이다. 삶의 질이 높아야 국민이 행복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7시간 근무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곳이 지상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 불리는 이유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 바로 ‘부탄’이다.
‘은둔의 나라’ 부탄
히말라야산맥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부탄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1907년 지방 토후 우겐 왕축이 부탄 전역에 흩어져있던 작은 왕국들을 통일해, 세습 군주에 오른다. 하지만 막강한 영국과 인도의 간섭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 인도와 번갈아 가며 체결한 불평등조약으로, 국제적 입지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1952년 3대 국왕(지그메 도르지 왕축)이 즉위하면서 부탄은 빠르게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특정 나라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를 진행할 경우 부탄 고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없다”라며 ‘비동맹 중립외교노선’을 선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왕은 재빠르게 국제연합에 가입해 독립국가로서의 부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부탄은 그러나 한동안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이웃나라였던 시킴(Sikkim)왕국의 선례 때문이다. 산세가 험준해 ‘산악왕국’이라 불렸던 시킴왕국은 국토개발을 위해 바로 옆 나라인 네팔의 값싼 인력을 대거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이주민 수가 급격히 늘면서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자 인도가 자국의 보호령이었던 시킴왕국을 1975년 22번째 주로 편입시킨 것. 3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킴왕국이 한 순간에 ‘주(州)’로 전락한 것이다. 시킴의 전례를 본 부탄이 선택한 길은 ‘통제’였다. 실제로 1970년대 허용한 외국인 관광은 철저한 통제 속에 이뤄졌다. 외국인이 일시에 몰려오지 못하도록 연 2만여명 이하로 입국을 제한한 것은 물론, 자유로운 배낭여행도 금지했다. 하루 200~250달러(숙소와 교통, 가이드 비용 포함)의 체류비를 내고 현지 여행사와 조율한 일정대로만 다녀야 한다. 관광을 허용한 지 50년이 돼 가지만 아직도 부탄을 방문한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유다.
삼림면적 60% 유지, 헌법에 명시
부탄 사람들에게 문화와 자연환경은 그들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과 12억 인구를 가진 인도가 위, 아래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만큼, 정체성을 잃는 순간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천혜의 비경과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집착에 가까운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주변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오랜 기간 부탄의 남부지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네팔계 주민들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부탄 정부는 네팔계 주민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이들의 취학을 금지하고, 부탄 토착어인 종카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또 관리들을 물론, 일반인도 공공기관에 갈 때는 반드시 부탄의 전통복장(남자들은 ‘고(Gho)’, 여자들은 ‘키라(Kira)’)을 착용하게 했다. 잇따른 차별정책에 네팔계 주민들은 반기를 들며 쟁의에 나섰다. 그러나 부탄정부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기는커녕 국가정체성 유지 및 국가안보를 이유로 약 10만명을 강제 추방시켰다. 그 결과 네팔계 주민들의 반정부 활동은 진정됐으나, 난민이 된 이들이 네팔로 유입되면서 부탄-네팔 간 오랜 외교갈등의 시발점이 됐다.
주어진 자연환경 또한 자신들의 일부라 여기는 부탄인들은 환경보호에 적극적이다. 환경을 위해 공장을 짓지 않는 것은 물론(그래서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해 값이 비싼 편이다), 삼림면적이 국토의 60% 이하로 줄지 않도록 이를 헌법에 명시했다. 부탄은 지형상 수력발전이 매우 용이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생산한 전기가 수출의 31%, 정부 수입의 20%, GDP의 14%를 차지한다. 경제성이 있는 잠재 수력발전량도 2만4,000메가와트에 달한다. 즉, 댐을 추가로 건설하면 그만큼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더 부유해질 수 있단 의미다. 하지만 부탄 정부는 환경을 파괴할 수 있단 이유로 개발을 최대한 미루고 있다.
내려놓을수록 강해지는 왕권
부탄에서 왕은 특별한 존재다. 대부분의 왕족들이 사치와 폭정으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다 쫓겨난 것과는 달리, 부탄의 왕족들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4대 국왕인 지그메 싱계 왕축이 그 시작이다. 16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그는 약 25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두 가지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헌법 초안을 마련한 것이 첫 번째다. 그는 “국왕 한 사람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며 “무엇이든 국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2001년 국왕의 행정권을 각료위원회에 이양하고,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토론을 유도하는 등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당시 절대군주제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대다수의 국민이 이를 반대하자, 그는 “미래의 부탄 왕들이 모두 좋은 왕이란 보장은 없으며, (나쁜)왕이 내린 결단으로 나라가 한 순간에 붕괴될 수도 있다”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이후 5대 국왕이 된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2008년 역사상 첫 총선을 실시했고, 입헌군주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마쳤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민행복지수’도 4대 왕의 업적이다. 국민행복지수는 경제발전만으로 국가를 평가하는 국내총생산(GDP)을 대체하기 위해 도입됐다. 물질적인 풍요보다 국민들의 행복을 더 중시하겠다는 4대 국왕의 철학이 담긴 것으로, ▦평등하고 지속적인 사회경제 발전 ▦전통가치의 보존 및 발전 ▦자연환경의 보존 ▦올바른 통치구조 등을 4대 축으로 한다. 이 또한 5대 국왕의 집권기에 구체화됐다. 그는 생활수준,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등 9개 영역의 33개 지표를 기반으로 GNH를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어 2008년 11월엔 GNH를 국가 정책의 기본 틀로 채택했다. 현재 부탄의 모든 정책은 GNH를 기반으로 실시되며, GNH 결과 행복도가 떨어지는 분야에 지원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 같은 정책 때문에 부탄의 왕족들은 이미 권력을 내려놓았음에도 여전히 국민들에게 종교지도자 못지 않은 존경을 받고 있다.
부탄은 여전히 ‘행복’한 나라인가
행복지수 도입으로 눈길을 끈 부탄은 2010년 다시 한 번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유럽 신경제재단(NEF)이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143개국 중 1위를 차지한 것. 당시 1인당 국민소득(GNI)이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였는데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응답했으니 깜짝 놀랄 결과였다. 특히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전제조건인줄 알았던 선진국 사람들에게 이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너도나도 부탄의 행복비결을 연구하며 그들을 칭송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부탄은 ‘행복의 나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약 7년여가 지난 지금, 부탄은 여전히 행복할까?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이 다양해 쉽게 단정하긴 어렵지만, 지표상으로만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예전만큼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특히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이 부탄의 행복지수를 끌어내리고 있다. 2015년 GNH 조사결과에 따르면 부탄 인구의 70% 이상(약 51만2,700명)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기반시설이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나타나는 개발도상국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농촌사람들의 박탈감이 커지면서 행복한 인구의 비중이 도시는 55%인 반면, 농촌은 38%에 그쳤다. 인구의 47.7%를 차지하는 농부들의 행복지수도 직업군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근대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자 실업률도 높아지는 추세다. 2015년 현재 부탄의 실업률은 2.28%로, 2010년(1.4%) 대비 0.88%포인트 증가했다. 서로 배려하고 나누는 것을 최대의 가치로 여겼던 문화가 희미해지면서 공동체가 붕괴돼 자살률도 높아졌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자살률 통계에 따르면, 부탄에선 매해 인구 10만명당 13.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살률 기준 세계 20위권이다. GNH조사에서도 평온ㆍ용서 등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부탄인 비중은 2010년 59%에서 2015년 51%로 줄어든 반면, 분노ㆍ화 등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비중은 같은 기간 35%에서 45%로 늘었다. NEF의 2016년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서 부탄이 56위로 추락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부탄에 부는 ‘한류 바람’
정체성을 지키려고 굳게 닫혔던 부탄 사람들의 마음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부탄의 수도 팀부 거리에선 한국 연예인들의 얼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999년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서구문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고, 최근엔 한류가 그 뒤를 이어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류 열풍이 거세지자 수교 30주년을 맞은 지난해 6월엔 수교 이래 처음으로 부탄에서 ‘케이팝(K-POP)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이 콘서트엔 왕실 가족은 물론, 총리ㆍ장차관 가족들과 함께 수도 인구의 5%에 달하는 2만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한류의 인기를 체감케 했다. 이제 부탄은 은둔의 왕국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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