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티베트

전문등반 죽음과 삶의 공존지대를 헤매다

화이트보스 2018. 7. 10. 10:47


[하이 드라마 | 에르하르트 로레탕] 죽음과 삶의 공존지대를 헤매다

  • 글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입력 : 2017.08.30 10:44[574호] 2017.08

에르하르트 로레탕 팀의 안나푸르나 1봉 산군 동릉 트래버스 초등기

몇몇 등반사가登攀史家들은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벽 등정(1983년 6월 10일)을 시작해 캉첸중가 남서벽 등정(1995년 10월 5일)을 끝으로 세 번째 8,000m급 14좌 완등자가 되는 것으로 나의 히말라야 등반 업적을 개괄槪括한다. 또한 등하산에 40시간이 소요된 에베레스트 북벽 등정(1986년 8월 30일, 파트너 장 트루아예), 30시간이 소요된 초오유(8,021m) 남서벽 등정(1990년 9월 21일, 파트너 장 트루아예-보이텍 쿠르티카), 20시간이 소요된 시샤팡마 남벽 중앙봉(8,008m) 등정(1990년 10월 3일, 파트너 장 트루아예-보이텍 쿠르티카, 주봉 8,013m은 1995년 4월 29일 등정)을 히말라야 등반사상 세 차례의 직등과 속도등정이라고 치켜세우며 찬양했다.

세계 산악계는 이 업적에 놀라워했다. 그러나 기나긴 동릉 초등을 기록하며 이루어낸 안나푸르나(8,091m) 1봉 등반은 등하산에 4일이 소요되었기에, 사람들이 외면했지만, 나한테는 마지막 8,000m급 봉우리가 될 뻔했던 위험한 산행이었다(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등반을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 중 하나로 극찬했음).

안나푸르나 1봉 산군을 트래버스할 때처럼 나 자신의 능력의 한계점을 초월한 적이 결코 없었다. 내 삶의 세계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본 적도 없었고, 죽음의 세계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서 본 적도 없었다. 천국과 지상 사이에서 보낸 그 나날 동안, 나는 사람이 고도高度 속에서 오랫동안 존재한다는 것은, 한쪽 발을 다음 세상(죽음의 세계)에 담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등정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하산할 때, 강풍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초목들의 새싹들처럼 또는 애처로운 까마귀 떼의 즐거운 비상飛翔처럼 삶은 불굴의 저항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허용해 주었다. 우리는 유령의 몰골이 되어 귀환했다.

우리의 꿈길은 고도 5,500m 지점에서 시작해, 고도 6,500m 지점까지의 가파른 최대 난구간, 다음으로 고도 7,000m 지점에서 동봉(8,010m)~중앙봉(8,051m)을 거쳐 고도 8,091m의 정상까지 7.2km에 달하는 매우 기나긴 능선, 그리고 북벽의 최대 난코스 하산 구간으로 구성되었다. 죄리 바르딜Jöri Bardill 대장의 스위스 대가 이 능선 등반을 시도한 바 있지만 실패했다. 그는 불행히도 알프스의 가이드 코스에서 등반 중 자신의 히말라야 꿈과 함께 지상에서 사라졌다.

스위스의 그리존스Grisons 주州의 몇몇 산악인들이 그의 꿈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고, 그들 중 한 사람인 노르베르 조오스Norbert Joos가 나에게 이 능선의 등반에 참가를 권유했다. 2개월간 지속된 원정대의 좋은 분위기는 일종의 인간성의 신뢰를 회복해 주었다.

남쪽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1봉 산군.
‘인류의 생존’에 안심하고 비 맞으며 BC 귀환

1984년 9월 11일, 우리들은 유명한 안나푸르나 성소Sanctuary 트레킹 코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풍경 속으로 캐러밴을 시작했다. 첫날 2명의 포터들이 강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들은 옷이 마르자 29kg 무게의 등짐을 지고 강 속을 헤엄친다는 것은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라고 토로했다.

팀 닥터 브루노 뒤러는 독일의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역할을 모방했다. 포터들이 한 사람씩 그의 진찰을 받았고, 인근 마을 사람들도 거의 다 진찰을 받는 혜택을 입었다. 브루노 박사는 자신의 의료 전문 목록에 한 가지 기술을 첨가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자신의 의료 장비들 중에서 펜치pinchers를 꺼낸 후 치과의사로 둔갑해 어떤 사람의 이를 억지로 뽑아주었다.

등반대는 등반 5일과 6일째 정글지대를 통과했다. 우리들은 밀림 속에서 거머리들의 급습을 받았다. 나는 샌들 차림으로 도보여행을 했기 때문에, 거머리들한테 34군데나 물리는 고초를 당했다.

9월 17일, 드디어 안나푸르나 성소의 중앙에 입장해 모레인moraine 지대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이곳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네팔인들은 이곳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신들의 거주 지역으로 굳게 믿고 있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텐트를 소유하고, 음악과 함께 생활하는 호사를 누렸다.

9월 20일, 내가 돌파한 버트레스buttress는 악천후 속에서라면 방심할 수 없는 난코스였다. 나는 고정로프 305m를 설치하고 나서 그 지형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제1캠프는 한 시간 못미치는 거리였다.

23일, 최고 난제 앞에서 등반을 착수했다. 나는 수직 빙벽 밑까지 396m 길이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2개의 아이스 해머로 무장한 채 2시간 동안 70m의 빙벽과 사투를 벌였다. 이제 등반의 자물쇠가 열린 셈이었다. 기술 등반의 관점에서 보면, 날씨와 건강 상태 외에는 어떤 일도 우리의 등정 성공을 방해할 요소가 없었다. 우리의 성공신화를 위한 상세한 분석도 작성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성공 분석이 전부가 아니지 않는가? 기상이 악화되어 우리들은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10월 9일, 노르베르 조오스와 나는 바깥 세계에 관한 뉴스를 접하기 위해 빙하를 건너가 두 채의 대나무 오두막집으로 구성된 ‘안나푸르나 호텔’(ABC의 로지)을 방문했다. 우리는 6주 만에 두서너 명의 처녀들을 구경하고 나서, 인류가 아직 생존하고 있다고 안심했고, 비를 맞으며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프리츠 호비, 우엘리 뷜러, 브루노 뒤러가 제2캠프까지 진출했는데, 그곳에는 눈이 내린다고 했다. 기압계의 오르내림에 따라 우리의 낙관주의도 오르내림을 반복했다.

아침나절에 나는 노르베르와 정상 등정을 시도하기 위해 출발했다. 우리들은 304m도 채 오르기 전에 세 번의 눈사태를 유발했다. 산악인들은 이런 이론에 동의한다. 산악인 각자 행운의 할당을 지니고 있는데, 이 행운이 바닥나지 않는 한, 그는 산에서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한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 닥친 세 차례의 눈사태는 행운이 크게 감소되었다는 징조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 원인을 밝혀 행운의 손실을 줄일 작정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제2캠프(6,500m) 텐트 속에 촛불을 켜놓고 낮은 소리의 음악을 감상했다. 밖에서는 폭풍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매혹적인 분위기는 동시에 나의 욕구불만을 일으켰다. 평화스러움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이 모든 등반의 노력과 야단법석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위無爲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8,000m 고봉 등반은 혼란을 야기하는 정사情事보다 더 악화된 사태라고 중얼거렸다. 우리 앞에 실패와 성공이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다. 우리들이 올바른 실을 선택할 수 있는지, 또한 우리가 그 실을 선택하는 방식을 알고 있기는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수면제를 복용하고 음울한 생각을 덮어버렸다.

16일, 베이스캠프로 하산해 세탁도 하고 샤워도 했다. 나는 곧 문명세계로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문명 속에서 인간다운 구실을 다시 실행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17일과 18일 양일은 날씨가 화창했다. 우엘리 뷜러와 브루노 뒤러 대원이 등반을 재개해 제3캠프까지 길을 틀 적정이었고, 노르베르와 내가 며칠 후에 그들의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낙관주의에 젖었고, 잠시라도 등정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20일, 우엘리와 브루노가 제3캠프(6,900m)에 도착했다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동릉의 능선에 도달할 것을 확신했다.

21일, 자명종이 공식적으로 잠을 깨우기 3시간 전에 깨어나, 그냥 잠자코 누워 있었다. 텐트 밖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날씨는 맑았고, 놀라울 정도로 무더웠다. 공중에는 강풍에 모래알이 날렸다. 계곡에는 빙퇴석들이 산재해 있었다. 여러 봉우리들 위에서 눈구름이 날려 능선에서 1.6km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그때까지 이런 이상한 현상들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선등자들은 제3캠프에서 틀림없이 텐트 속에 갇혀 지낼 것이다. 우리는 햇볕을 받으며 오전 8시 제1캠프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침낭과 약간의 식량을 더 짊어지고, 다음 구간으로 향했다. 우리는 탈진상태라 잰걸음으로 등반했다. 빙벽에서 고정로프는 이미 얼음 속에 붙박혀 있었다. 때때로 나는 고정 로프에서 등강기를 떼어내고, 일정거리를 고정로프의 도움 없이 등반하다가, 다시 고정로프로 등반하곤 했다.

정오쯤 제2캠프에 도달해 텐트의 토대를 파내어 개량했는데, 욕조 형태로 변모했다. 오후 5시 무전으로 우리는 브루노와 우엘리가 제3캠프로 향하다가 강풍에 쫓겨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텐트로 되돌아왔을 때 그들은 호흡곤란으로 질식 일보 직전 상태였다. 우리도 그날 2,400m의 고도를 높였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들었다.

1 에르하르트 로레탕. 2 안나푸르나 1봉 산군의 북면의 더치립 하산 루트.
작은 설동을 화려한 왕궁으로 착각

22일 오전 4시 반, 노르베르에게 나의 등정 계획을 알렸다. 악천후로 인해 지연된 날짜들을 벌충하기 위해 급습작전에 나서 제4캠프(7,500m)까지 직등할 작정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지만, 내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오전 6시 출발, 8시 반에 제3캠프에 도달했다. 고소복장으로 바꿔 입고 등반을 속행했다. 우엘리와 노르베르 그리고 내가 교대로 앞장서서 길을 텄다. 우리들은 오후 1시 30분 능선상의 초입에 위치한 ‘록누아르Roc Noir, 검은 바위, 7,490m’ 정상에 도달했다. 이곳까지는 이미 등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브루노 뒤러는 자신의 직업상 의무를 기억해 냈다. 그는 11월 4일 스위스의 직장에 출근해야 한다. 만일 스위스의 모든 사람들이 산봉우리들을 등반하며 자신들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다면, 스위스의 국민총생산GNP이 오늘날의 수치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7,490m 지점에서 그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우리는 52일간 고난의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깊은 정이 들었다. 나는 그의 작별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 사이 두 명의 대원들은 능선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나는 등반을 재개해 우엘리 대원을 앞질렀다. 그는 혼자 무언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뒤돌아서서 고소 복장 위로 내민 그의 핼쑥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병색(고산병의 시초)이 역력해 기분이 무척 언짢았다. 낭가파르바트에서 겪었던 피터 힐트브란드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천만금을 준다 해도 그 비극을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우엘리는 아직 의식이 명료했다. 자신의 강력한 의지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는 하산을 종용하는 충고는 귀담아 듣지 않았고, 101m 위쪽에 위치한 제4캠프까지 등반을 원했다. 그의 고집스런 두뇌는 하산을 외면해, 우리는 마침내 그를 을러댔다.

“만일 자네가 제4캠프에서 취침하기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한밤중에 병자인 자네를 수송하며 하산을 강행해야 할지도 모르네. 등반대는 필경 실패를 맞이할지도 모르며, 또한 자네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네.”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브루노 뒤러의 발자국을 따라 하산했다. 노르베르와 나는 설동에 도착해 눈을 파내고 생활공간을 더 넓혔다. 나의 발은 젖어 있는 상태였다. 다음날 끊임없는 강풍에 난타당하며 8,000m 지대에서 행해야 할 능선 등반이 두려웠다. 나는 스토브 위에 내 발을 말릴 작정이었다. 프리츠 대원이 남겨둔 침낭을 이용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나는 난로 쪽에 침낭 속의 발을 대고 말렸다. 설동은 닭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침낭의 뚫린 구멍들을 작은 붕대로 수선했는데, 그 침낭들은 단열성이 뛰어났다. 설동은 작은 초가지붕의 오두막만큼 아늑했으며, 왕궁王宮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시설로 착각되었다. 우리가 켜놓은 촛불들이 약간의 온기를 방출하며, 깜빡거렸다. 우리는 으깬 감자와 치즈로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어 공중누각空中樓閣을 쌓기 시작했다. 트래버스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1봉의 산군 중에 동봉 정상만 밟아도, 그것 자체가 대성공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다음날이 행운의 날이 되기를 소망했다.

23일 오전 4시 반, 날씨가 화창했고 바람은 잠잠해졌다. 우리는 식사를 하지 않고 5시 반경 설동을 출발해 동봉으로 향했다. 30분 후 벽 앞에 섰다. 벽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았으나, 겉모습이 위태로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벽 쪽을 피했다. 엄청난 위험에 노출된 루트를 등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슬랩지대를 몇 발자국 오르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 루트가 너무 위험해 서서히 하산했다. 위험지대에서 배낭 속에 자일을 얌전하게 둘둘 말아 넣고, 하늘을 향한 가파른 길로 등반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노르베르를 확보해 주었다. 그는 슬랩지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설사면의 경사도가 완만해졌다. 우리는 8시 반에 동봉의 기슭, 안부에 당도했다. 동봉의 정상은 아주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각적 환상optical illusion의 끝인 정상에 도달하는 데 4시간쯤 걸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직도 488m를 더 올라야 했다. 그 488m는 우리들의 등짐, 각자 15kg 무게가 증대되어 우리 기운을 짓밟아 놓고, 나아가서 우리의 연약한 척추 배열을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나는 등뼈가 몹시 아팠다. 아픔을 참으며 설사면을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었다. 다행히 눈이 단단히 얼어붙어 있어서 길을 트는 수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아래쪽 제3캠프에서 우리 등반을 지켜보고 있을, 프랭크와 프리츠 대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곧 동봉 정상을 밟으리라 생각하며 기쁨에 가득 차 있으리라 상상했다.

노르베르와 나는 등반 방식이 달랐다. 그는 빠른 속도로 등반하고 자주 휴식을 취하는 반면, 나는 천천히 등반하며 될 수 있는 한 휴식을 적게 취했다. 노르베르는 토끼 같았고 나는 거북을 닮았다. 우리는 등반 중 달리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슬기롭게 전진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의 등반 속도는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나 자신의 몸이 더 쇠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맹렬한 굶주림은 우리가 9시간 동안 공복空腹으로 등반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동봉 정상 밑이 난코스 구간이어서 우리는 로프를 묶었다. 노르베르가 계속 리드를 했고, 나는 등반 중에 그다지 큰 고통을 받지 않았다.

북쪽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신군 북면. 남벽 BC에서 등반에 나선 에르하르트·노르베르 2인조는 룩누아르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동릉을 주파하고 더차립루트를 따라 북면 BC로 하산했다.
우리는 두 사람 외에 ‘공포심’, 이렇게 셋이 활동했다

드디어 오후 2시경 동봉 정상을 밟았다. 그런 고도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세차게 불어대는 강풍이 우리를 마중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의심한 적이 없는 것처럼, 동봉과 중앙봉 사이의 안부를 향해 돌진했다. 마치 우리의 에너지가 주봉을 공략하도록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믿을 수 없는 트래버스를 계속했다.

우리는 서로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생각들이 완전히 합일된 것 같았다. 콜로 하산하는 등반은 예상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능선 위로 덩실거리며 춤추는, 즉 왈츠 춤에 도취하며 나아갔다.

한 시간 후 안부에 도착했다. 그날 이미 먼 길을 걸어왔다고 판단했다. 동료들에게 주봉을 등정한 후, 북벽으로 하산하겠다는 내용의 무전교신을 보내고 그날 밤을 보낼 준비에 돌입했다. 윈드 슬랩wind-slab(부드러운 눈 표면 위에 바람에 의해 형성된 두꺼운 눈 껍질)처럼 이상하게 생긴 눈 표면을 파고,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얼음 동굴을 만들 작정이었다.

오후 6시경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고도 8,020m 지점이었다. 그곳은 몹시 추워서, 우리 몸속의 모든 섬유질이 떨고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 세이드Sade의 노래 가사 후렴처럼 ‘왜 우리는 함께 살 수 없나요?’의 곡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왜 8,020m 지점에 와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우리는 마치 개들이 몸에서 벼룩을 털어내려고 몸부림치듯이 강추위로 인해 몸을 덜덜 떨며 고통을 감수했다. 등반화를 벗고, 오버부츠를 침낭 속에 집어넣었다. 두 켤레의 양말을 벗어 복부 부근에 챙겨 넣었다. 발에는 다운 벙어리장갑을 끼고 그 위에 벌집 모양의 양말을 신었더니, 따뜻한 온기가 회복되었다. 만일 북서풍이 파고들지 않고, 가루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며 뒤따르지 않는다면, 설동 속이 아주 쾌적한 장소라고 만족했을 것이다.

그날 밤은 내가 8,000m 지대에서 처음으로 비박으로 보내는 밤이었다. 이곳에서의 비박의 결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동상의 염려) 공포에 떨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실수도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지역에 있었다. 그 노래의 후렴이 내 머릿속에서 괴롭히지 않게 되기를 희망했다.

‘말씀해 주세요, 왜 우리들이 10월 24일 수요일, 바람에 날려 온 눈보라에 뒤덮인 침낭에서 빠져나왔는지?’, ‘왜 우리들이 등반화에서 한 자 높이의 눈 덩어리들을 털어냈는지?’ ‘왜 우리들이 주봉으로 등반을 계속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강풍은 전날보다 더 격렬했고, 다음날인 24일에는 누그러졌다. 오전 10시경 안나푸르나의 중앙봉 정상을 넘었다. 우리는 안나푸르나의 주봉 밑에 위치한 최종 안부를 향해 하산을 계속했다. 그런데 놀라운 장애물이 등장했다. 높이 91m의 록밴드rock-band 위에 도착했던 것이다. 추락하면 우리의 뼈를 박살낼 만큼 단단한 암벽이었다. 나는 슬프게도 제자리에 남겨둘 그 귀중한 2개의 피톤을 가져오도록 권고한 하늘에 감사했다.

현수하강용 확보물을 설치하고 최종 바위 틈새에 도착했다. 그곳에 배낭을 벗어놓고, 마지막 100m 정도의 정상 등반을 위해 출발했다. 나는 마치 날개가 달린 듯 빠른 속도로 등반했다.

한 시간 뒤 우리는 세계 10번째 고봉, 안나푸르나 8,091m 정상을 밞았다. 오후 1시 반이었다. 포옹했다. 커다란 행복감이 내 몸을 관통했다. 내 마음속의 통계 숫자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아마 그날 글레이셔돔Glacier Dome·7,190m 위로 루트를 개척한 후 록누아르를 세 번째 등정하고, 안나푸르나 동릉의 초등, 그리고 동봉, 중앙봉, 주봉의 등정을 마치고 네팔의 8,000m봉우리의 첫 번째 트래버스를 성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내가 ‘아마’라는 단서를 붙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 말은 현명하게 어학 상 조심하라는 의미의 말이다. 왜냐하면 네팔의 8,000m급 고봉을 최초로 트래버스한 사실을 찬양하려면, 안나푸르나 북벽 베이스캠프에 살아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업적’과 별개 사항이다. 우리는 방금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모험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등반한 루트로 되돌아가 하산할 수 없었다. 높이 91m 록밴드가 우리의 선택권을 없애 버리고 하산로를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안나푸르나 주봉 정상에 10분간 머물렀다가 안부로 하산했다.

그곳에서 배낭을 찾아 짊어지고, 북벽으로 하산을 감행했다. 우리는 마치 물살이 센 여울목을 걸어서 건너듯이 주의 깊게 전진했다. 이 벽에 산재한 비어 있는 심연들이 급류처럼 우리를 삼켜버린다면, 각자의 발자국은 마지막 발자국으로 변모할 것이다. 이날 안나푸르나 1봉 북벽의 미로에서 총 두 시간 반 동안 하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노르베르와 나, 두 사람 외에 ‘공포심’, 이렇게 셋이 활동한 셈이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거대한 안나푸르나 1봉 북벽에 관한 유일한 설명서는 내가 배낭의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간 우편엽서 한 장뿐이었다.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부분의 벽은, 수직 암벽 사이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세락seracs(빙탑)들로 구성된 벽이었다. 우리가 100% 죽음에 직면해 있었다고 말한다면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삶의 공존지대를 헤매고 있었다. 이 표현이 생존이란 말에 관해 내린 정의라고 생각한다. 안나푸르나 1봉 북벽에 역사적인 ‘시클 루트Sickle route’(서양의 작은 낫 모양의 빙벽을 낀 빙하)와 ‘더치 립 루트Dutch rib route’(네덜란드 대 개척), 이렇게 2개의 루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클 루트’는 프랑스 초등대의 엘조그Herzog 대장과 라슈날Lachenal 대원이 동상으로 인해 그들의 발가락과 손가락의 상당 부분을 잃게 만들었으며, ‘더치 립 루트’(안나푸르나 북벽의 노멀루트, 한국의 여성 산악인 지현옥 대원이 이 루트로 등정 후 하산 중 실종)’는 직등 루트에 가깝고 ‘시클 루트’보다 등정시간이 단축된다. 우리는 하산 루트로 더치 립 루트를 선택했다. 이제 그 루트의 초입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안나푸르나 북벽의 6,800m 부근에서 우리는 네 번째 비박을 맞이했다. 배낭에서 텐트를 꺼내다가 폴 하나를 91m 록밴드 아래 접근이 불가능한 곳에 떨어뜨렸다. 현대에 제작되는 텐트는 교묘하게 설계되어, 모든 폴이 텐트를 고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분실한 폴 대용으로, 로프 한 토막을 사용해 텐트를 고정시키려고 했다. 
오후 6시에 임시변통의 텐트가 구축되었다. 나는 2리터의 차와 고깃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36시간동안 음료를 거의 마시지 못해 갈증이 극에 달해 있었다. 우리는 영양보충으로 하루에 ‘오보 스포츠 바Ovo Sport bar, 초콜릿’ 2개씩을 먹었다.

텐트가 강풍에 요동치는 동안 나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았다. 텐트는 빙폭 위쪽에 위태롭게 설치되었다. 장비는 각자 아이스액스 한 자루씩과 5mm 로프 50m, 그리고 아이스스크루 한 개가 전부였다. 그곳 지형은 정확하게 ‘뗏목’ 형태도 아니었고, 또한 항공기도 닮지 않았다.

에르하르트 로레탕이 암벽등반하는 모습(트랑고 타워에서).
우리는 5cm 두께 눈을 뒤집어쓴 채 살아 있었다

다음날인 10월 25일 햇볕을 기대했으나, 날은 잔뜩 흐렸다. 오전 8시 반에 하산을 재개했다. 구명 뗏목 역할을 하는, 작은 스퍼spur(돌출부), 즉 ‘더치 립 루트’ 초입을 찾아내야 했다. 마침내 그 스퍼를 찾아냈고, 그 주변이 구멍투성이라는 걸 알았다. 스퍼 위에 위협적인 빙탑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하산을 계속했고 90m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이 루트로 등반을 시도했다는 명백한 산 증거, 즉 고정로프를 발견했다. 그러나 고정로프에 도달할 방법이 막막했다. 내가 향하는 곳마다 공포의 천지였고, 바라보는 것마다 공포로 떨게 했다. 사방이 절벽이었고, 우리들은 절벽의 포로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위쪽으로 되돌아가 프랑스 루트로 하산할까? 그렇게 하자면, 우리의 피곤 상태로 인해 하루 종일이 허비될 것이다. 이 위험한 루트로 모험을 감행했다.

노르베르가 자신의 아이스액스를 나에게 넘겨주고, 나는 유일한 아이스스크루를 빙벽에 박고 그를 50m 아래로 하산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벽이 오버행이라고 소리쳤다. 그는 로프를 어깨에 걸치고 15kg 무게 배낭을 짊어진 채  펜듈럼(진자운동)해서, 레지(얼음턱)에 도달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몸을 확보해야 했는데, 아이스액스 없이는 불가능했다. 내가 내려가서 아이스액스를 미끄러뜨려 전달했고, 그는 자신을 확보한 후 아이스 액스를 나에게 되돌려주었다.

내가 매우 위험한 작업을 되풀이할 차례였다. 견고한 얼음덩어리를 발견했다. 거기에 로프를 감아 앵커로 삼고 노르베르의 확보를 받으며 하산했다. 반복되는 러시안 룰렛 행위 때마다, 방아쇠를 당겨야 할 위태로운 순간이 찾아왔다. 오버행에 도착해서 몸을 마비시키는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하산을 계속했다. 나는 허공 속으로 뛰어내려 5m 아래 지점에 닿았다. 로프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로프를 풀고 앵커로 사용하기 위해 얼음 기둥을 깎았다.

우리는 네 차례의 현수하강 끝에 필라 밑에 도착했다. 희망사항과 달리 다음 구간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빙벽에 손잡이나 발판이 없었다. 로프를 풀었다. 빙벽에서 미끄러져 죽을 바엔 혼자 죽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애타주의愛他主義이다.

경사도 65도의 빙사면을 내려갔다. 각자 2개씩의 아이스액스만 지녔더라면 웃으면서 하산했을 구간이었다. 오래된 고정로프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하산했다. 오후 4시경에 우리는 빈약한 장비로 커다란 플래토Plateau(고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걱정거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안나푸르나에서 쏟아져 내리는 모든 눈사태의 통로였다.

당시 북벽을 경유해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려는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엄청나게 많았다. 우리는 캠프 잔해를 발견하고, 먹을 것을 찾다가 전년도에 사망한 셰르파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얼음 재킷 차림이었고, 하늘이 그의 영원한 무덤이었다.

밤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지쳐서 바위 옆에 쓰려졌다. 웅덩이를 발견하고 갈증을 풀었다. 옷을 입은 채 침낭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0월 26일, 한 시간 일찍 깨어나 태양을 기다렸다. 그 순간 산은 귀에 익은, 빙탑사태의 점점 커지는 노호怒號 소리로 메아리쳤다. 처음에는 빙탑사태를 탐미주의자처럼 관망했다. 장관이었다. 그러나 곧 생각이 지각변동과 함께 확고한 기반을 쌓았다.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분명히 그 빙탑사태가 우리를 매장해 버릴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 아이스액스를 움켜잡았다. 거리가 멀어도 후폭풍이 우리를 뒤흔들었다. 우리는 가루눈 투성이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서 5cm 두께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후 1시 우리는 모레인 지대를 밟고 갔다. 지옥의 문은 우리 등 뒤에서 닫혔다. 한 시간 동안 걸어서 굶주린 얼간이들처럼 일본대와 체코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과 음료를 대접하고 축하해 주었다.

10일 후 우리는 카트만두에서 동료대원들과 재회했다.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그때 지상의 천국에 있다는 기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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