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대중공업 FPSO 설계팀이 울산 조선소 독(dock·배 만드는 작업장)에서 건조 중인 선박을 배경으로“힘내자”를 외치며 뛰고 있다. 뒤로 보이는 배가 완성된 후 다음달부터 바로 이 작업장에서 초대형 FPSO 건조 작업이 시작된다./울산=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현대중공업 FPSO(해상 정유 설비) 설계팀 2004년 '키좀바'로 시작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올라 10년 이상 내다보고 키운 전문 인력이 팀 주축으로
아프리카 앙골라 북서쪽 370㎞, 수심 1200m 해역에는 현대중공업이 2004년 6월 미국 엑슨모빌에 인도한 FPSO(부유식 원유생산·저장설비) '키좀바(Kizomba)-A'가 가동되고 있다. 원유 220만 배럴을 저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다. 10m 높이 파도와 초속 30m 강풍에도 끄떡없이 제 위치를 유지하며 원유를 생산·저장하고 있다.키좀바를 통해 현대중공업은 FPSO 분야 세계 최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대중공업의 FPSO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13%)로 지식경제부 선정 '세계 일류 상품'에 올랐다. 특히 초대형 FPSO는 1조~2조원대의 고가 품목으로, 현대중공업의 시장 점유율은 58%나 된다.
설계팀 최을곤 상무는 "키좀바 프로젝트는 큰 모험이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수주 당시 선박 건조(建造) 경험은 많았지만 설계 도면이 1만장이 넘고 들어가는 전선의 길이가 1500㎞에 달하며 부품이 낱개로 몇 개인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한 FPS O 설계 경험은 없었기 때문.
◆설계팀 평균 근속기간 16년
2003년 9월 13일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 최을곤 상무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작업장 바닥에 앉아 전날 밤 태풍 매미의 강풍에 떠내려간 FPSO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건너편 현대미포조선에서 건조 중인 선박과 충돌한 뒤 불안정하게 기울어진 상태로 멈춰 서 있었다. 이 FPSO는 현대중공업이 2001년 처음으로 자체 설계한 것이었다. 1년 넘게 어렵사리 설계를 끝내고 상당 부분 작업이 진행된 상태였는데 태풍 때문에 일을 망칠 위기에 놓인 것. 하지만 설계팀은 제조팀과 함께 주말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1개월 만에 복구에 성공했다. 결국 정해진 기간보다 한 달 앞서 FPSO를 인도했고 현대중공업의 설계 능력에 반신반의했던 엑슨모빌은 "맡기기를 잘했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설계팀이 초기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극복하며 납기를 지키고 좋은 품질을 유지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들 전체의 평균 근속 기간은 16년이나 된다. 경험이 많아 문제에 부딪히면 당황하지 않고 곧 해답을 찾는다. 진병석 부장은 "미래를 대비해 1990년대 중반부터 집중 양성한 전문 인력들이 지금 주축이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겪은 수많은 실수를 A4 1000장 분량의 자료로 만들어 '재발 방지용'으로 쓰고 있을 만큼 교육이 철저하다.
유준호 차장은 "전선 하나, 파이프 하나 설계가 잘못돼도 길이 300m, 폭 60m짜리 대형 FPSO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현대중공업의 설계 오류 비율은 1%대로 정확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직(離職) 제한 규정도
설계팀은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패기가 넘친다. 1997년 기본 설계 도면을 받은 채 프랑스 토탈로부터 처음 FPSO를 주문받았을 때였다. "완벽한 FPSO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150여명의 설계 인력들이 처음 6개월간 수시로 밤 12시에 퇴근했죠. 불규칙한 식사로 위장병을 앓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이상균 부장)
한국의 첨단 IT 기술도 큰 힘이 됐다. 현대중공업은 키좀바를 만들면서 세계 최초로 대형 FPSO 작업에 3차원 설계 시스템을 도입했다. 선체와 그 안에 들어가는 전선·파이프·기계장치들을 입체적으로 설계하는 프로그램이다.
설계팀은 경쟁사나 중국 등으로 옮겨갈 경우 기술 유출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내부 규정으로 이직을 쉽게 못 하게 돼 있다. 사직 후 일정 기간 회사를 옮길 수 없으며, 기술을 넘길 경우 법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다른 직종보다 대우가 특별히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 설계팀에 온 최성호씨는 "최고 제품을 만든다는 매력에 이끌려 합류했다"고 말했다.
오병욱 해양사업본부장은 "FPSO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응용 제품을 개발해 세계 초일류 경쟁력을 계속 확보해나가겠다"고 말했다.
FPSO
(부유식 원유생산·저장설비)
이미 뚫어놓은 심해 유정(油井)을 통해 원유를 뽑아 올려 정제해서 저장한 뒤 유조선에 하역하는 설비. 쉽게 말해 '바다에 떠 있는 정유공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