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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鹿)이 말(馬)로도 될 수 있는 나라 이야기

화이트보스 2009. 11. 4. 13:15

사슴(鹿)이 말(馬)로도 될 수 있는 나라 이야기
입력: 2009.11.04 00:00

최혁
<편집국 부국장>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아 법의 힘을 자꾸 빌려야만 하는 사회라면 무엇인가가 잘못됐다. 그런데 법의 힘을 빌린 결과가 상식과 자주 어긋난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때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의도적으로 상식을 비틀곤 한다. 정치와 돈은 안되는 일도 되게 한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그럴싸한 법조문을 찾아내면 된다. 법이 지닌 모호함과 해석의 재량권 때문이다.
미국은 법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법으로 따진다.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소송으로 해결을 하려 한다. 능력있는 변호사를 만나면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도 무죄를 받아낼 수 있다.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미식축구의 영웅 O.J 심슨이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거액의 수임료를 받은 변호사의 능력 때문이었다. 확정판결 전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미국 미조리주는 도박이 금지돼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세인트루이스 외곽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 위에는 카지노 배들이 떠있다. 도박이 금지된 곳이었지만 버젓이 도박장이 운영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법’ 때문이다. 도박을 금지한 것도 법이었고 도박을 가능케 한 것도 법이었다.
미조리 주법에는 다른 주와의 경계선에 있는 하천 수면위의 선박은 주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예외조항이 있다. 카지노업자들은 이 조항을 이용했다. 미조리주와 미시시피 주 경계선에 있는 강에 큰 배를 띄워놓고 카지노를 운영했던 것이다.
카지노 도박업자들은 더 큰 탐욕을 부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수족관식 대형빌딩이었다. 큰 빌딩을 짓고 수면아래 공간에는 강물을 채웠다. 그리고 나서 이 구조물은 물에 떠 있는 것이니 선박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며 카지노 허가를 신청했다.
미조리 주 검찰과 뜻있는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카지노 허가의 합법성을 놓고 검찰과 시청, 카지노 업자들간의 법리 공방이 계속됐다. 재판이 시작됐고 카지노 업자들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능력있는 변호사들을 고용했다.
결국 수족관 빌딩에 카지노가 들어설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돈의 힘이 강위에 세워진 빌딩을 배라고 둔갑시킨 것이다. 경제권력의 힘앞에 상식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필자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상식을 벗어난 일에 대해 국가권력으로 강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여러가지 조문들이 법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 생각도 접었다.
주민등록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기는 커녕 태연자약 고위직에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정치권력 앞에서는 법의 권위가 무참해진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최고의 헌법기관이라는 헌법재판소에서는 며칠전 정말 이상한 결정 한 가지를 내놓았다. 언론관련법과 관련해 ‘절차에 문제는 있으나 법효력은 유효하다’는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상식선상에서 무슨 소리인지 정말 모르겠다. 헌재에서 내놓은 결정이니 뭐라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나 아무리 곱씹어봐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다른 경우로 풀어보았다. 경우야 조금 다르겠지만 ‘수능시험을 보면서 어떤 학생이 부정행위를 하려 한 것은 문제가 있으나 수능점수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식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상식적으로 어긋난 일이다.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당연히 결과에도 문제가 있는 법인데, 헌재의 결정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니 말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상식이 법보다 우선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관계가 상충돼 상식으로 풀 수 없는 것이라면 법의 힘을 빌려야 한다. 허나 그 전제조건은 법의 저울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울여져 있는 저울인데도 똑바르다 우길 수는 없다.
중국 진나라때 진시황의 부하였던 조고(趙高)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죽였다(지록위마·指鹿爲馬). 조고는 당시에는 권력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로부터는 몇천년동안이나 조롱받는 인물이 돼 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