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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위해 '國營 위안소'까지 만들었던 일본

화이트보스 2013. 7. 12. 15:14

미군 위해 '國營 위안소'까지 만들었던 일본

  • 박정훈 부국장·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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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7.12 03:02

    패전 후 日 '특수위안시설협회' 국가 시스템으로 매매춘 용인
    미군 요구로 7개월 만에 폐쇄, 추한 과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性과 인간 존엄 짓밟는 발상 여전…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본

    
	박정훈 부국장·기획에디터 사진
    박정훈 부국장·기획에디터

    하시모토 도루(일본유신회 대표)는 일본에서 아베 총리 다음으로 인기 있는 정치인이다. 과격한 망언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 좌충우돌 국수주의자가 또 사고를 쳤다. 그는 며칠 전 선거 유세에서 "미군도 (일본 정부가 만든) 위안부 시설에서 여성을 이용한 적이 있다"고 발언했다. '미국도 위안부를 이용했는데 왜 일본만 갖고 뭐라느냐'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국가적 치부(恥部)를 드러낸 셈이 됐다. 일본이 감추고 싶어하는 '국영(國營) 위안소'라는 과거 말이다.

    하시모토가 언급한 위안소는 2차대전 직후 존재했던 RAA(특수위안시설협회)를 지칭한다. 영문 명칭을 'Recreation(여흥)'과 'Amusement(오락)'로 표기해 포장했지만 실상은 국가 공인 매춘 단체였다. 일본 정부의 재정·행정 지원 아래 여성을 고용해 미군 상대 매춘 영업을 했다. RAA가 운영한 위안소는 당시 일본 전역에 수백 곳이 산재해 있었다. 숙박시설과 함께 카바레·댄스홀·맥주홀 등이 설치됐고, 총 5만3000명의 여성이 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시(戰時)의 군인 매춘이 일본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시모토의 말마따나 미국이나 영국·프랑스도 주둔지 주변에서 병사들의 매매춘을 용인했다. RAA가 달랐던 것은 공식적인 국가 시스템이었다는 점이었다. 설립부터 행정명령에 의해 이뤄졌고 온갖 정부 지원이 주어졌다. 현대 문명국치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부가 매춘 제도를 운영한 나라는 없었다.

    RAA는 지극히 일본적인 발상에서 탄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패전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 고노에 후미마로 부총리가 경시청 총감을 부른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고노에는 군국주의 시절 세 차례 총리를 지내며 해외 침탈을 지휘한 특급 전범(戰犯)이었다. 그는 경찰 책임자에게 "자네가 선두에 서서 일본 딸들의 순결을 지켜달라"고 주문했다. 점령군 미군이 들어오면 성범죄가 빈발할 테니 대책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당시 수십만 명의 점령군을 맞아야 하는 패전국 일본은 공포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상황을 미국 사학자 존 다워는 명저(名著) '패배를 껴안고'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전쟁 중에 수많은 비(非)일본인 여성이 강제로 위안부가 돼 일본 군인의 노리개가 됐다는 것, 그리고 자국 군대가 해외에서 강간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일본인에게 (미군에 대한) 공포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급하게 서둘러야 했다. 고노에의 지시 다음 날 위안소 설치에 관한 내무성 통첩이 시달됐고, 일주일 뒤 RAA가 설립됐다. RAA는 신문 광고 등을 통해 여성들을 끌어모았다. 미군 선발대가 일본 열도에 처음 상륙한 8월 28일엔 이미 국영 위안소 1호가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일본의 국영 매춘소는 성병 확산을 우려한 미국 요구로 폐쇄될 때까지 7개월간 성업(盛業)했다.

    RAA에는 온갖 지원과 특혜가 주어졌다. 일본 정부는 건축 자재와 집기·의복·이불 등을 현물 출자했고, 콘돔 1200만개까지 제공했다. 자본금 1억엔 중 5500만엔을 대장성(大藏省)이 보증해주기도 했다. 지금 화폐 가치로 치면 수백억엔에 달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당시 재정 지원을 담당한 이케다 하야토 대장성 국장은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킬 수 있다면 (5500만엔도) 싸다"는 어록(語錄)을 남겼다. 그는 그 후 승승장구하며 총리 자리까지 올라 4년간 집권했다. 이케다처럼 국영 위안소를 당연시하는 인물이 전후(戰後) 일본의 정·관계를 이끌었다. 그런 뒤틀린 정신세계가 지금껏 이어져 내려와 아베나 하시모토의 뇌 세포에도 새겨진 듯하다.

    나는 패전 직후 일본 지도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딸과 아내가 능욕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정신을 가진 나라라면 자국민을 국영 매춘부로 만든다는 발상은 하지 못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군대나 위안부가 있었다"며 당당한 이들을 보면 그저 아연할 뿐이다. 하시모토는 과거 치부까지 드러내며 "미군도 일본의 위안부를 이용했다"고 했다. 이 발언을 보며 나는 매음굴 포주가 고객에게 "당신도 우리 가게에 오지 않았느냐"고 들이대는 장면을 연상했다.

    미군용 국영 위안소는 조선인 여성을 끌고 간 일제(日帝)의 위안부 제도와 맥락을 같이한다. 국가 목표를 위해 여성의 성(性)과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을 수 있다는 발상이 똑같다. 착취 대상이 일본 여성이냐, 조선 여성이냐의 차이일 뿐 소름 끼치는 군국주의 발상이다. 지금 일본 정치인들이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매춘부'로 매도하는 정신병의 뿌리가 이건가 싶다.